▲일본 교토에 있는 고려미술관 입구.<사진제공·최재용>
최재용
"고려미술관을 처음 방문한 게 2001년입니다. 불상 연구자라 그곳에 '목조아미타삼존불감'이 있다는 걸 알고 실견(實見)하러 간 거죠. 그게 인연이 됐습니다. 교토라는 지역은 굉장히 보수적인 곳이에요. 천왕이 살았다는 자부심이 강하고, 인맥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곳이거든요. 재일조선인이 그런 곳에 미술관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아요. 그걸 가능하게 한 건 정조문 선생의 인품과 열정에 감동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교토대학교 교수이자 전 고려미술관 관장인 우에다 마사아끼씨와 소설가 시바 료타로씨 등이 그들이다. 시바 료타로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에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구명운동에 나선 사람이기도 하다.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3년을 다닌 게 다이고, 파친코 가게를 개업해 돈을 벌었다는 정조문 선생의 이력이 궁금했다.
1918년 경상북도 예천군 우망리에서 태어난 정조문은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중국 상해에서 민족 지도자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을 했던 그의 아버지 정진국이 기울어진 가세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아내와 세 자녀를 데리고 간 것이다.
교토에 터를 잡은 가족은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지 못했다. 정조문은 가난해서 학교에 갈 엄두를 못 내고 8세에 직물점 수습공이 됐다. 소학교 4학년 나이에 겨우 4학년으로 입학한 정조문은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이 학교 교육의 전부였다. 1~3학년 교육 과정은 교과서를 빌려 독학해 진도를 따라잡았다.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해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단상에 올라 답사를 읽은 그였지만, 일본 사회 어디에서도 '조센징'이라는 따돌림을 피할 순 없었다.
1937년 어머니가 과로로 사망하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할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오사카로 이주한 그는 공사 현장에서 노동해야 했다. 언젠가는 기필코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으나, 해방 후 먼저 귀국한 아버지가 '1946년 대구 10.1 사건'으로 사망하자, 조국과 인연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1951년 33세인 정조문은 교토에서 파친코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지만 폭력배의 간섭이나 경찰의 비협조로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 그는 선술집이나 초밥집, 찻집을 개업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사업이 안정될 무렵 어느 날, 정조문은 교토 뒷골목을 산책하다 고미술거리의 한 상점에서 아무 장식도 없는 순백의 이조백자를 보고 매력을 느꼈다. 더욱 놀란 것은 집 한 채 값의 가격이었다. 어디서도 자랑할 게 없던 '조선'이었는데, 고미술 상점에서 가장 높은 가격으로 진열된 것을 보고 '조선의 자랑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1년간 할부로 물건 대금을 지급하기로 협상한 그는 이후 평생 우리 문화재 수집에 힘썼다.
보통의 수집가들이 재산 가치가 있는 문화재만을 모으는 데 반해 생활용품과 민화 등, 민족의 삶과 연관한 것은 무엇이든 모았다. 일본 속의 '조선'을 모아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던 동포들에게 조선의 자랑스러움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고려와 조선의 고미술품 수집에 집념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수장가(收藏家)는 많습니다. 그러나 문화재의 가치를 가장 잘 담보해낸 사람이 정조문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모으고 싶어 했던 건 갈 수 없었던 조국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죠."정조문은 문화재를 모으는 작업을 독립운동이라 여겼다.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흩어져있는 문화재들을 모아 통일된 조국에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려미술관'이라고 한 것도 '고려'가 통일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정조문의 국적은 죽을 때까지 '조선적'이었다. 조선적(朝鮮籍)이란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재일조선인 가운데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일 미군정이 외국인 등록제도의 편의상 만들어 부여한 임시 국적이다.
일본 정부는 '구 조선호적등재자 및 그 자손(일본 국적 보유자는 제외) 가운데 외국인 등록상 국적 표시를 아직 대한민국으로 변경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공식 해석한다. 사라진 조선을 국적으로 가지고 있으니 무국적자인 셈인데, 일본에 4만여 명이 있다. 정조문은 남한과 북한이 온전한 조국이 아니라고 판단해 어디든 선택하지 않았다.
"남도 북도 내 조국이고 고향입니다. 부모님이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어디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슬픔을 견디면서 재일교포로 살면서 이곳 교토에서 눈을 감겠습니다." 1988년 고려미술관 개관 즈음에 일본 <NHK>와 한 인터뷰의 일부다.
고려미술관은 지하1층·지상2층 규모로, 소장품은 도자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중 100여 점은 매우 뛰어난 국보급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부설기관으로 고려미술관연구소가 있는데, 한국 문화 연구와 관련 강좌 개최 등을 하고 있다.
정조문이 40년간 고민한 끝에 이 미술관을 만든 이유는 후손들이 민족정신을 잊지 않고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이해하는 공간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개관 4개월 후 고려미술관에서 사망한 정조문은 '통일된 조국에 미술관을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좋아하고 존경해 시작한 일 '정조문을 알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