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도 이충무공기념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충모각의 뒤에서 삼문을 바라본 풍경. 삼문 밖 솔숲 아래가 바다이다.
정만진
이충무공기념비로 올라가는 숲속에는 홍살문이 버티고 서서 분위기를 돋우어 준다. 기념비를 보러 가는 길이지만 흡사 사당 참배를 가는 듯 마음이 경건해진다. 경내로 들어가는 삼문에는 모충문(慕忠門) 현판이 걸려 있다. 모충은 이순신의 충성을 추모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일 터이다.
비각도 삼문처럼 모충을 당호(堂號, 집이름)로 쓰고 있다. 유적지는 기와 담장이 둘러져 있어 자못 단정한 느낌을 준다. 모충각 담장 둘레와 경내에는 소나무들이 훤칠하게 자라 있어 보기에 시원하다.
이곳 비석의 조선 시대 공식 이름은 '有明朝鮮國(유명조선국) 故三道統制使(고삼도통제사) 贈左議政忠武李公(증좌의정충무이공) 高下島遺墟記事碑(고하도유허기사비)'이다. 긴 이름 가운데서 유명(有明)조선국(朝鮮國)이라는 표현이 유난히 마음에 거슬린다.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속국으로 생각한 조선의 지도부문화재청은 긴 이름을 '고하도 이충무공기념비'로 줄여 사용하고 있다. 앞에 섬이름 고하도를 붙인 것은 다른 곳에도 이순신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들이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다.
이 비는 1709년(숙종 35)에 남구만(1629∼1711)이 비문을 지었고, 조태구(1660∼1723)가 글씨를 썼다. 전액(篆額, 제목)은 이광좌(1674∼1740)가 썼다. 남구만, 조태구, 이광좌 세 사람은 모두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들이다. 과연 이순신을 기려 세운 비석답게 당대의 거물들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남구만이 남긴 글 중 교과서에 실린 데 힘입어 거의 국민시조 반열에 오른 작품 한 편을 감상한다.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 칠 아이는 여태 아니 일어났느냐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17행 48자로 구성된 비문 원문은 남구만의 <약천집(藥泉集)>에 '高下島李忠武公記事碑(고하도이충무공기사비)'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비석 앞면에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고하도를 군대 주둔지로 정한 과정, 전쟁시 군량미의 중요성, 1647년(인조 25) 군대 본부가 당곶(목포시 이로동 하당)으로 이전되면서 이순신 유허가 소실 위기에 놓이자 통제사 오중주가 유허비 건립을 주도한 내용, 후임 통제사로 하여금 고하도가 진터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 등이, 뒷면에는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