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개혁 개방의 가장 큰 수혜자인 선전 야경홍콩과 맞닿아 개혁개방의 초기 기지가 된 선전은 10만 안되던 인구가 2000만명으로 급성장했다
조창완
1권 '개혁과 개방'은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부터 1982년까지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의 실권을 쥐는 이야기가 중심이고, 2권 '파벌과 투쟁'은 1983년부터 1987년까지를 다루고 덩샤오핑이 이끄는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을 다룬다. 3권 톈안먼 사건은 1988년부터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한 1992년까지는 주로 다루는데, 아무래도 가장 큰 쟁점인 톈안먼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책은 덩샤오핑이라는 막후 실세 지도자의 행보를 씨줄로, 역사적 흐름을 날줄로 하고 있다. 저자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등 중국 혁명 1세대가 대부분 사망한 1976년부터 88세의 노구를 이끌고 남순강화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 1992년까지를 덩샤오핑의 시대로 보고 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편년체 역사서이지만 독자들은 중국에 대한 다양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우선 저자는 덩샤오핑의 시대가 톈안먼 사건이라는 큰 갈등을 겪었지만 나름대로 성공한 시대라고 본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봤다.
첫 번째는 개혁 개방을 결정하고 지도했던 강력하고 통찰력 있는 정치 리더십이고, 둘째는 결정한 개혁 개방을 현실에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했던 정치 제도와 유능한 당정간부, 셋째는 중국의 특수한 상황과 변화하는 국제 환경에 맞추어 만들어진 개혁 개방 정책이라는 것이다.
이 시대의 리더는 현실 지도자보다는 오히려 8대 원로로 불린 혁명 2세대였다. 덩샤오핑, 천윈, 리셴녠, 예젠잉, 펑전, 양상쿤, 보이보, 덩잉차오를 말하는데 이들은 모두 90세 이상 살았고, 1990년대 사망했는데, 사망 직전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들이다.
물론 이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덩샤오핑이고, 그가 변화를 주도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의 사망 직후 가장 당면한 문제는 4인방의 처리였고, 이는 마오에게 공식으로 권력을 이양받은 화궈펑과 군부에 강한 원로 예젠잉이 주도해 큰 무리없이 처리된다.
1973년 2월 하방을 끝내고, 1975년 1월 부총리가 된 덩샤오핑은 그해 정돈운동으로 개혁에 대한 나름대로 자신을 얻는다. 이후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네 차례의 해외탐방을 떠나고, 싱가포르 등을 통해 방향성도 얻는다. 일단 덩샤오핑은 외국의 신기술 도입, 외국 자금 이용, 교육 사업과 과학연구라는 철학을 기조로 한다.
당시 덩샤오핑의 생각을 현장에서 진행해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다행이었다. 완리는 안후이성에서 농촌을, 자오쯔양은 쓰촨에서 도시개혁의 실험을, 시중쉰은 광둥에서 연해지역 수출산업과 선전 등 경제특구의 기초를 다졌기 때문이다. 특히 선전특구는 1979년에서 2007년까지 매년 GDP 성장률이 33.8%를 기록해 인구 10만의 지역이 2000만명이 되는 기적을 만들었다.
덩샤오핑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없을 리 만무했다. 온건한 개혁파인 천윈이나 후차오무 등은 경제특구가 제국주의 강점가에 조계나 다름없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야오방의 지지 등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화궈펑이다. 마오가 직접 육성하고 선택한 후계자인 화궈펑은 '양개범시'(兩個凡是 마오가 작성한 정책이나 지시는 시종 변함 없이 따른다)를 내세우며, 지도자나 인민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
반면에 덩샤오핑은 1978년 6월 2일 열린 전군 정치공작회의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을 주장하고 개인숭배, 교조주의, 유심론을 비판하면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이런 흐름에 천윈, 리셴녠, 예젠잉 등이 지지하면서 서서히 덩샤오핑 쪽으로 저울의 추가 기울기 시작했고, 그 시점을 1978년 12월에 열린 11기 3중 전회로 본다.
다음해 2월 열린 11기 5중 전회에서는 왕둥싱 등 화궈펑 세력이 물러나고, 덩샤오핑의 노선을 지지하는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승진해 실질적으로 덩샤오핑의 시대가 더 굳어진다. 물론 덩의 시대는 1982년 9월 열린 12차 당대회를 통해 중앙군사위 주석을 맡으면서 확고해진다. 중앙군사위 주석은 이후에도 중국 권력 향배를 가늠하는 주요한 잣대인데,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으로 이어지는 만큼 실질적 지도자인 핵심인물(领导集体核心人物)을 상징한다.
새로운 엘리트 키운 덩샤오핑2권 '파벌과 투쟁'은 아무래도 역동성이 떨어지는 시기인데, 저자는 그 관전 포인트를 보수파와 개혁파의 투쟁에 맞추었다. 화궈펑이 사라진 시대에 원로정치 인사 가운데 보수파는 천윈과 리셴녠을 중심으로 보고, 대척점에 개혁파 덩샤오핑이 있는 구조로 본다.
덩샤오핑은 하루라도 빠른 개혁개방을 주장하고, 너무 빠른 개혁의 부작용을 아는 천윈은 안정적인 전진을 주장한다. 실제로 두 세력은 주기적으로 세를 과시한다. 이를 덩리췬은 좌우파동주기설이라고 설명하는데, 크기는 달라도 서로 주장을 내세우면서 여론을 장악하려 한다.
그런데 덩샤오핑에게 노령화되는 지도체제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1982년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은 대약진이나 문혁의 세대를 넘을 인재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바로 '제3제대 프로젝트'다. 1980년 국가기관 30여 곳 주요 지도자의 평균 연령이 63세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에 덩샤오핑은 간부의 4화(연소화, 지식화, 전문화, 혁명화)를 주장하며 젊은 인재를 발탁했다. 이런 여파로 1982년에 중앙 당정기관에서 총 7260명의 고위급 간부가 퇴직했는데 이는 전체 고위급 간부의 8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왕자오궈, 장쩌민, 리펑, 후진타오, 원자바오 등도 선발해 차세대와 차차세대의 기틀까지 다지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부각한 인물이 장쩌민이다. 1986년 안후이성 허페이 과기대 시위로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됐는데, 그 당시 장쩌민은 상하이시 시장이었다. 그는 12월 18일 모교인 상하이자오퉁대학에서 열린 시위에 참석해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의 영어 전문을 외워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당시 총서기는 1982년 12기에서 당선된 후야오방이었다. 그런데 학생 시위가 진정되지 않으면서 1987년1월에는 반강제적으로 퇴진하는 상황에 이른다. 후야오방의 퇴진에는 지식인 정책에서 덩샤오핑과 틈이 생기고, 원로들의 퇴진에 대한 직설적 주장이 원인이었다. 이런 상황은 개혁파로 그를 밀었던 덩샤오핑으로서도 뼈저린 일이었다.
이후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불러 새로운 판을 짠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1987년 11월 1일 13기 1중전회 폐막에서 확정된 새로운 상무위원회다. 당시 5명의 상무위원은 짜오쯔양, 리펑, 차오스, 후치리, 야오이린 등으로 큰 색깔이 없었다. 물론 이 구성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텐안먼 사건이 끝난 89년 6월에 개최된 13기 4중전회에서 장쩌민, 러펑, 차오스, 야오이린, 쑹핑, 리루이환 체제로 대체된다.
덩샤오핑과 장쩌민의 힘 겨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