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책 표지
문학동네
어느덧 데뷔 20년을 맞은 중견작가 성석제의 소설집이 출간됐다. 최근 4년 동안 집필한 소설을 모은 <믜리도 괴리도 업시>와 함께 출간된 <첫사랑>은 소설가로 활동을 시작한 직후 쓴 소설 8편을 모은 것이다. 소설가 인생 20년을 돌아보며 그 중에서도 초기작을 고른 것인데 <믜리도 괴리도 업시>와 비교해 보면 성석제라는 작가의 성장, 나아가 그 글의 장점과 단점을 선명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실린 소설들은 첫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와 두번째 소설집 <조동관 약전>에 실린 글 가운데 성석제 스스로 내세울 만한 작품을 따로 추린 것이다. 이미 나온 작품집에서 굳이 작품 몇 개를 골라 다시 책으로 출판하는 수고를 했고, 새로 쓴 소설은 단 한 편도 실리지 않아 그리 새로울 건 없다. 다만 성석제가 스스로 고른 초기작이기에 그의 팬을 자처하는 독자에겐 제법 흥미를 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학평론가 노태훈씨는 성석제를 가리켜 '의심할 여지 없는 프로 소설가이고 이야기에 한해서는 맹수에 가깝다'고 했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성석제는 이야기의 참신한 형식과 흥미를 자극하는 구도, 설정 등을 통해 어찌되었든 독자에게 글을 읽히는 데 있어 최고 수준의 작가다. 그를 아는 독자 가운데 그의 소설이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불과 4.5초 동안 펼쳐지는 이야기를 30여 페이지에 걸쳐 쓴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나 문단마다 반복되는 경두라는 이름이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경두>, 오랫동안 벙어리인 줄 알고 지낸 여자의 편지를 대필한 남자가 술회하는 이야기 <유랑> 등 소설마다 전개방식과 분위기가 각양각색이다.
그럼에도 그 초기작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인상을 들자면, 표리부동한 인간이 주요하게 등장하고 결말에 이르러 대단하게 보였던 인물이 실상은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을 비범하게 그려내고 점차 그 안팎의 온도차를 대비시켜 조금씩 균열을 내다 마침내 그 실체를 드러내는 방식이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데, 그와 같은 특징이 독자 일반에게 조금씩은 내재해 있으리란 점에서 더 매력적으로 읽힌다.
다만 특이한 구성과 참신한 형식이 많은 데 비해 이야기가 빚어내는 인상이나 주제의식이 강하지 못하다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그의 초창기 소설은 쉽고 빠르게 읽히는 대신 그만큼 빠르게 휘발돼, 이야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도 남지 않게 된다.
어디선가 아이 하나가 빨간 비옷을 입고 달려간다. 어디선가 세상에 나서 서른일곱 해 지난 육체가 벌레 먹은 밤송이처럼 떨어져내린다. 아이가 멈추어 서서 "아빠아" 하고 외친다. 그 뒤를 지쳐 보이는 한 여인이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걸어온다. 비가 가늘어지고 이윽고 그친다. 여인은 우산을 내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디선가 하늘 한 귀퉁이가 열리고 그 아래의 세상에 손수건만한 넓이의 햇살을 내려보낸다. 새 한 마리가 깃을 털며 날아오를 차비를 한다. 포르르 난다. - <새가 되었네> 중에서애드거 앨런 포, <검은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