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궐 밖 조선에서 제일 큰 집’이라고 알려진 선교장은 근방의 부속건물과 별채 초가를 포함하면 300칸에 이르는 대장원(大莊園)을 형성하고 있다.
장호철
지난 시월 중순에 나는 '회갑'을 맞았다. 올해는 병신(丙申)년, 60년 전 내가 태어난 잔나비 해가 한 바퀴 돌아 다시 온 것이다. 한 40~50년 전만 해도 소나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겠지만, 우리 가족은 모여서 밥을 한번 같이 먹는 걸로 이 날을 기념했다.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주초에 아내와 함께 강원도 여행을 떠났다.
제주도를 생각하다가 비행기와 숙소 등 이것저것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게 성가셔 포기하고 선택한 데가 강원도였다. 나는 강릉을 거쳐 설악산을 다녀오는 일정을 짰다. 그러나 내가 준비한 것이라곤 한 달 전쯤에 호텔 어플을 통해 첫째 날 숙소로 정동진의 리조트를 예약한 게 다였다. 첫날만 예약한 것은 어차피 평일이니 우리 한 몸 뉘일 데가 없겠느냐 싶어서였다.
회갑에 떠난 강원도 여행강원도는 경상북도와 붙어 있지만 우리에게 그 심리적 거리는 서울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 서울은 열차든 고속버스든 곧장 이를 수 있는 반면 강원도는 그 접근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하루 두 차례 강릉으로 운행하는 열차편은 영동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강릉역이 폐쇄되면서 현재 정동진까지밖에 운행하지 않는다. 이 열차로 정동진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거의 6시간에 가깝다.
그러나 강원도 도계와 가까운 안동에 살 때의 느낌은 좀 달랐다. 중앙고속도로에 차를 올리면 한 시간쯤만 달리면 원주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말에 두 차례나 강릉 여행을 시도한 것은 그런 셈속에서였다. 그러나 두 번 다 우리는 원주 지나 새말에서 차를 돌려야 했다. 한번은 교통정체로, 또 한번은 심상찮게 날리는 눈발 때문이었다.
강릉이란 도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신사임당 얘기를 통해서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국어 시간에 배운 음운현상으로 강릉을 다시 만났다. 강릉은 '자음접변' 현상에 따라 '강능'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강릉이 구체적인 도시로 처음 다가온 게 우리 세대 대부분이 그렇듯 고교 수학여행을 통해서였다. 당시 수학여행은 대구에서 열차를 타고 강릉까지 간 다음 거기서부터는 전세버스로 설악산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기차에는 우리 학교뿐 아니라 일정이 같은 여학교 학생들도 타고 있었다.
학교별로 객차는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지만, 기차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진행할 때면 저쪽 앞 객차에 타고 있는 세일러복 여고생들을 볼 수 있었다. 급우들은 차창을 올리고 상체를 내밀어 여자아이들을 향해 거의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그럴 때 먼빛으로 바라본 저편 객차의 여학생들은 마치 우리가 생전 만나지 못했던 불가사의한 존재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그 까마득한 과거의 장면을 불러내자, 아내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던 것 같아. 그리고 우리는 마치 더벅머리와 단발머리 고교생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으로 예국(濊國)의 땅, 하슬라(河瑟羅)로 들어갔다. 집에서 출발한 지 4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고교 수학여행의 기억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가 그린 여정은 단순했다. 나는 이곳저곳 기웃대는 여행 대신 한두 군데 집중하는 여정을 짰다. 물론 머릿속에서만이다. 출발 전에 강릉시에 신청해 '강릉 관광 안내 책자'도 받았지만 나는 선교장과 경포대, 난설헌 생가 터, 정동진과 안목항의 커피거리 정도를 찾을 작정이었다.
여행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느긋하게 여행을 즐기는 법이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거라는 걸 깨닫고 있어서였다. 시간 단위로 여정을 짜는 바람에 일정에 떠밀리듯이 다니는 여행이란 다만 일상의 연장에 그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여유롭게 보고 즐기되 필요하면 한두 일정쯤이야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여정마다 인증 도장을 받아야 하는 숙제도 아니니 발걸음은 한층 가볍지 않겠는가. 여정을 마칠 때마다 차의 시동을 걸어놓고 우리는 다음 여정을 합의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