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의 사당 '선희궁'의 흔적(오른쪽 제각). 그리고 뒤편 언덕이 조선의 명승지였던 '세심대'이다
유영호
이렇게 교정으로 들어와 좌측에 위치한 맹학교의 건물 뒤편에 이르면 선희궁의 제각이 하나 남아 있다.정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작은 제각이지만 학교 담장과 더불어 유일하게 남은 선희궁의 흔적이다.
이곳은 영빈 이씨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통상 국왕이나 왕비의 신위는 종묘에 모시지만 그가 낳은 자식이 왕이 되어도 후궁은 그곳으로 갈 수 없어 따로 모셔진 것이다. 본래 이곳의 명칭은 '의열궁'이며, 그의 묘도 '의열묘'라고 칭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빈이씨의 손자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조에 추존하고 이곳 영빈이씨의 사당을 '선희궁'으로, 그리고 그의 묘는 '수경원'으로 높여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을 가까이하기 시작함으로써 이에 불안을 느낀 노론 세력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이 노론 세력에 그의 장인 홍봉안은 물론이요 생모인 영빈 이씨까지 가세하는 등 사도세자의 처가와 외척은 거의 전부가 정치적으로 그의 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빈 이씨는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죽이게 하는 결정적인 조언을 했다. 권력이란 이처럼 모자지간의 정을 끊어버릴 만큼 참으로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한편 이곳 선희궁 바로 뒤편에 세심대(洗心臺)라 불린 언덕은 조선시대 손에 꼽히는 경승지로서 경관이 좋아 당대 명문가들이 많이 찾았고 '선희궁'을 찾았던 영조, 정조 등 임금이 직접 거동한 곳이다. 특히 정조는 매년 봄 육상궁과 선희궁 등을 참배하면서 이곳 세심대에 행차하여 꽃구경을 하고 활을 쏘며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洗心臺'라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로서는 찾을 수 없고'后泉(후천)'이라고새겨져 있다. 왕후의 샘이란 뜻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 또 '甘流泉(감류천)'이란 글자도 새겨져 있어 그 물의 맛을 상상하게 해준다. 이곳에 오르면 멀리 한양 남쪽이 전체적으로 조망되는데 왕후의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며 멀리 관악산을 바라보며 할머니 영빈이씨를 상상했을 정조를 그려본다.
후궁의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