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어느 날. 아직 책꽂이가 낮던 때.
최종규
아직 추위가 안 가신 1994년 삼월 어느 날, 신촌백화점 앞길에서 신촌장로교회로 가는 길목, 이 길목 가운데에서도 밑으로 움푹 파인 자리에 헌책방 <공씨책방>이 있었어요. 헌책방 옆에는 까만염소를 고는 집이 있었고요.
신촌에 가야 할 일이 있으면 꼬박꼬박 <공씨책방>에 들렀어요. 어느 날에는 나이 지긋한 손님이 하는 말을 귓결로 듣습니다. "옛날이 좋았다"는 말을요. 옛날 광화문 자리가 좋았다는 말씀을 신촌에 작게 웅크린 헌책방에 들러서 하시더군요.
그 어르신 말씀마따나 사람 발길 없는 움푹 파인 구석자리에 있는 〈공씨책방〉은 참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고 초라해 보인다고 하는 헌책방에 깃든 '책'은 어느 하나 초라하지 않아요. 우리가 읽어 주기를 기다리는 책이요, 우리 손길을 받으면 새롭게 피어날 책입니다. 우리가 기쁘게 읽어 주면 기쁘게 빛날 책이요, 우리가 곱게 읽어 보면 눈부시게 날아오를 책이에요.
헌책방 <공씨책방>은 몇 해 뒤 신촌백화점 쪽에서 더 멀어진 자리로, 이러면서 신촌장로교회 고갯마루하고 가까워지는 자리로 옮깁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새로 옮긴 자리는 예전 자리에 대면 이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훨씬 적더군요. 어느 모로 보면 '세월과 유행에 밀려나는' 헌책방 모습 같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달리 보았어요. 까만염소를 고는 냄새가 자욱하던 구석자리 움푹 파인 골목보다는 앞이 환히 트이고 한결 조용한 이곳이 '책방 자리'로 아주 낫다고 여겼어요. 책을 볼 사람은 틀림없이 찾아오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새로운 터를 외려 반기리라 여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