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마을
추미전
"둘 있는 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세대가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어릴 때 개구리 잡고 가재 잡던 마을을 다시 복원시켜서 아이들한테 물려주는 것이 제일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함께 사는 촌락공동체 같은 것을 새로운 형태로 복원시키고 자연속에서 순박한 정서를 가지면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2006년 임업인 오찬 발언그때 그는 대통령이 아니라 마을주민으로서 마을앞을 흘러가는 죽어가는 화포천을 살리기 위한 꿈과 계획을 가지고 한창 그 일을 도모하고 있다고 했다.
두 번째 봉하를 찾은 것은 2009년 5월이었다.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에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라하다가 우리 같은 많은 사람들이 봉하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퇴근을 한 뒤 봉하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 내내 차가 막혔고, 봉하마을은 아직 한참 멀었는데 더 이상 차량 접근이 되지 않아 내려서 차를 옆에 세우고 긴 줄의 끝에 섰다. 봉하마을이 보이지도 않는 먼 위치였다.
줄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 줄의 끝까지 가야 그의 영정 사진이나마 볼 수 있었다. 그만큼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어느 정도 줄이 줄어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자 차가 늘어서 있던 들녘 옆으로 만장들이 곳곳에 휘날리고 있었다 .현실이 아닌 어느 영화 한 장면 같았다.
마을은 1년 전, 마치 잔치집 같던 분위기와는 너무 달랐다. 마을 전체가 거대한 슬픔에 잠긴 초상집이었다. 줄은 뒷쪽으로 자꾸 늘어나기만 하고 앞으로는 정말 더디게 줄었다. 불평 한마디없이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모두가 조용히 서서 한걸음씩 한걸음씩 앞으로 갔다. 밤 10시에 도착해 다음날 어스럼하게 주변이 밝아올 때까지 서 있어야 했다. 마을 주민들은 그때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전히 손님들이 많았다. 그러나 1년 전 잔치집의 주인 같이 즐겁게 분주하던 얼굴이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한 슬픔이 배어나온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었다. 마을주민들은 시골 여느마을처럼 이 고장의 특산품인 단감을 파느라고 길가에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지난 두 번의 방문 때처럼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며 마을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됐다.
한 사람의 생애가 얼마나 가치 있었는지는 그가 떠난 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면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는 떠났지만 마을 곳곳에는 그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마음들이 절절이 새겨져 그의 향기는 더 짙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