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상업고등학교(현, 여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교련을 가르치다.
박도
마침내 교단에 서다그 이튿날은 토요일로 1971년 7월 10일이었다. 나는 김 이사장이 일러준 대로 동마장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가서 태평리행 버스표를 산 뒤 충주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서울 시가지를 벗어나자 곧 비포장도로였다. 꼬리에 흙 먼지를 단 충주행 직행버스는 경기도 광주, 이천을 경유한 뒤 2시간 만에 태평리 시외버스정류장에 닿았다.
주로 옷가지와 책을 가득 담은 여행용 가방을 들고 내린 나는 곧장 학교로 찾아갔다. 학교까지는 버스 정류장에서 10분 남짓 거리로 언저리는 온통 논밭들이었다.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 무렵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하교한 탓인지 교정은 고즈넉했다. 교문 한쪽에는 '신성중학교', 다른 한편에는 '신성상업고등학교'라는 교명이 붙어 있었다.
내가 그 10여 년 전에 다녔던 고향의 구미중학교와 흡사했다. 나는 텅빈 운동장을 가로 질러 본관 교사로 가면서 이를 악물었다. 일단 내년 신학기까지 참고 지내자고 스스로에게 두세 번 다짐했다.
교무실로 들어가자 일직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하신 윤병수 교감선생님은 과묵하신 분으로, 나의 인사를 받고는 곧장 당신의 애제자로 고려대 법학과를 나온 허용호를 아느냐고 물었다.
마침 그 친구는 나와 학훈단(학군단) 동기로 2년 동안 같이 교육을 받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런 관계를 말하자 그 학교 졸업생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윤 교감 선생님은 이 학교 터줏대감으로, 현 재단 이전부터 학교를 지켜온 분으로 보였다. 친구의 은사라 하여 나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국어와 교련을 가르치다우선 침식 문제를 걱정했더니 일직을 하던 이규태 선생님이 자기가 하숙을 하는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퇴근 시간을 기다려 그 선생님을 따라 학교 앞 마을 태평리의 한 초가집 사랑채에 들게 됐다.
다음 월요일 날 아침 직원조회시간에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곧장 학생조회 때 전교생에게 인사했다. 곧 교무부장은 수업시간을 배정해 줬는데, 중2 네 학급 국어와 고1 국어, 그리고 고1, 2, 3의 교련과목이었다. 첫날 김 이사장이 당신 학교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운 까닭을 그제야 알았다.
중학교는 학년당 3~4학급으로 정원을 채웠지만, 고교는 학년 당 한 학급뿐인데, 한 학급마저도 정원 미달이었다. 그래서 정규 교련교사를 두지 못하던 중, 장교 출신이 내가 부임하자 안성맞춤으로 그 자리를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농촌학교 중·고교생들이라 매우 순박해 보였고, 잘 따랐다. 나에게 배당된 수업시수는 주당 24시간이었는데, 결강이 나면 나는 자원해서 보강할 만큼 몸을 사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수업에 들어갔다. 두 개 학년의 국어 수업준비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운동장 수업인 교련수업도 각 학년 두 시간으로 그때마다 군복으로 옷을 갈아입는 등 수업준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수업준비에 실제 수업으로 무척 바쁜 일과였다. 부임 사흘이 지나자 7월 15일로 그날 오후 사환이 선생님들에게 도장을 지참하고 서무실로 가서 봉급을 타라고 했다. 나는 부임 사흘 만에 봉급을 받기가 좀 미안했지만, 그래도 7월 한 달 절반이 넘는 18일을 근무하기에 별 생각 없이 선생님들 뒤에 줄을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