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57개 단위 대학 총학생회 및 단체가 참여하는 '박근혜 정권 퇴진! 전국 대학생 시국회의 선포식'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이들은 대학별로 이어지던 시국선언의 물결을 모아 박근혜 정부 퇴진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윤석
거리에 나온 대학생들은 쉽게 환영받는다. 지금 같은 때에 얼마나 힘드냐는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 2016년 7월 통계청에 따르면 청년실업률은 9.2% 이른다고 한다. 올해 최저임금은 6030원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학자금대출은 12조에 이른다. 사라져가는 일자리, 생활비도 안 되는 적은 임금, 학점과 스펙 쌓기, 주거난에 학자금대출까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은 지금 청년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이들의 부드러운 훈계나 다를 게 없다. 시민들과 함께 거리로 나서자고 할 때 청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혹시 나중에 취직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하는 현실적인 고민이다. 우리의 삶이 무너져가는 걸 뻔히 보면서도 분노를 참고 오늘을 살아야 하는 이유, 누군가에게 정치를 대리하게 되는 이유는 진실로 삶의 문제이다.
막상 거리에 나섰을 때 난자하는 공권력의 탄압도 학생들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다. 이제라도 말하고 싶어서 거리에 함께하자니 '불법'이라고 한다. 아무리 평화롭게 집회나 시위에 참여해도 판정이 매번 다르니 어찌될지 가늠할 수 없다. 차벽이 먼저 설치되어 있어도, 신고까지 하고 평화 행진을 해도 체증, 연행이 따라붙는다. 운 나쁘면 벌금 폭탄이 이어진다. 2014년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을 주도했던 용혜인 대표는 징역 2년을 구형받았다. 헌법상의 자유는 '불법' 낙인에 너무나도 취약하다.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이 전 국민이 참여하는 운동이 되고, 대학가 시국선언이 불붙자 언론은 4.19 혁명을 언급하며 학생들에게 행동을 요청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80년대에 살고 있지 않다. 청년들의 삶은 그때와는 다른 의미로 나빠졌다. 약탈은 보다 교묘해졌고, 책임은 보다 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보지 않으면, 누구도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 누가 누굴 돌보랴. 가계부채가 1300조에 이른다. 모든 삶이 무너지고 있다. 청년들에 대한 기대 안에, 진짜 '청년'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는 있다. 거리에 나왔던 대학생들은 1000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 많은 대학생들이 그보다 자유로운 시민의 자격으로, 억압받는 청년의 이름으로 거리에 있었을 것이다. 다만 대학생으로, 어떤 깃발로 스스로를 드러낼 이유가 없고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단순히 '운동권 혐오' 같은 게 아니다. 그저 '대학생'이라는 정체성을 갖기에 그 이름이 너무 가볍고 버거웠기 때문이리라. 명예는 선배 열사들에게 얻은 것뿐이요, 스스로 얻고 짊어진 건 핍진한 삶이기 때문이다.
연단에서 "이제 대학생들이 앞장서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해 싸우겠습니다"라는 말이 외쳐질 때, 그건 관성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절박한 말이기도 하다. 이 삶을 바라보라는 절절한 호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미 거리에는 시민들이 있었다. 그러니 저 말이 향해야 했던 건 시민들이 아니라, 바로 대학생들 그 자신이었다. 교문이라는 높은 벽을 여전히 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기대와 멸시를 동시에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말이다. 누군가의 기대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삶을 말하기 위해 우리가 있다. 그 이름이 대학생일 필요는 없겠지만, 불붙어가는 이들의 분노를 바라봐야 할 필요가 적어도 우리 자신에게는 있다.
2008년 촛불시위, 2011년 반값등록금, 그리고 2016년의 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