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금 전달재일동포 2세, 이춘자 씨가 윤미향 정의기억재단 상임이사에게 후원금 전달
윤미향
"저도 당연히 함께할 책임이 있잖아요."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힌 이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피해자 신고전화를 개설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고 문옥주 할머니가 두 번째로 전화벨을 울려주셨고, 연이어 신고 전화가 왔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언론과 방송을 통해 공개되면서, 침묵하고 있던 여러 피해자도 본인의 경험을 공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암흑의 시기에 딸 혹은 어머니를, 부인을, 형제를 떠나보낸 채 생사조차 모르고 있던 가족들에게 피해자의 신고전화는 또 다른 의미를 지녔다.
"혹시, 피해자로 신고한 이름 중에 우리 누님이 계실까요? 이름이 OOO인데요." "우리 고모님이 그 당시 어디론가 실종되어 아직도 호적에 실종 상태로 남아있는데, 혹시 찾을 수 없을까요?"그런 내용의 전화가 수도 없이 왔다. 해외 동포들 중에서도 그런 '혹여나'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정의기억재단에 200만 엔(한화로 약 2천200만 원)을 기부한, 오사카에 살고 있는 이춘자씨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이춘자씨의 아버지는 서당 훈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 아들은 3.1만세항쟁 때 횃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가 행방불명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잠을 편히 자지 못했다. 형이 자꾸 꿈에 나온다면서 술을 마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이춘자씨는 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자식들에게조차 호적에 올라있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완용과 같은 이 씨에 '완' 자 돌림인 '이완순'이었으니 평생 치욕적이고 부끄러워서 자식들에게조차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에게 더 깊은 아픔이 있었다. 그 아버지와 평생을 함께 살았지만, 법적 부인으로 살 수 없었던 이춘자씨 어머니. 그녀의 슬픔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와 연결된다.
"아버지가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그 부인이 결혼하자마자 바로 '위안부'로 끌려갔어요. 결국 아버지는 혼자가 되었던 거죠. 해방이 되고 나서 아무리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보다 아홉 살 아래였던 우리 엄마와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이춘자씨의 아버지는 '위안부'로 끌려갔던 그 부인의 이름을 호적에서 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평생을 부부로 살았지만 남편의 호적에는 아내로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아버지의 첫째 부인 이름이 '조복수'(趙福守)였는데, 김학순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여서 한국에서 피해자들이 신고를 하고 있다는 뉴스를 일본에서 들을 때마다 온통 한국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지냈다. 혹시나 조복수라는 피해자가 신고를 했는지 기다렸지만 결국 그런 피해자는 없었다.
"지금도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이렇게 나요 너무나 불쌍해서... 그렇게 위안부로 끌려가신 어머니도 불쌍하고, 우리 아버지도 불쌍하고, 우리 어머니도 너무 불쌍해요." "피해자의 동행인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