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린각은 본래 영천시 자양면 노항동에 건립되었는데, 1785년(정조 9) 건물이 소실되었고, 2년 뒤인 1787년(정조 11)에 재건되었다. 동린각은 그 후 성곡동으로 이전, 보수되었다가, 영천댐 축조 때문에 1976년 현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
정만진
여러 해전에서 계속 공을 세운 김완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추천을 받아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고, 1595년에는 한산도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한다. 하지만 '배에 오른 지 5년이 되도록 바다에서 지내면서 형제와 처자를 만나지 못한 채(김완 문집 <해소실기>의 표현)' 수군 장수로서 왜적과 싸우는 일에 분투하던 그의 생애는 뜻밖의 풍파에 휘말린다. 이순신이 파직되고 1597년 1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후의 일이다.
1596년 12월 1일, 소서행장의 밀사 요시라가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찾아온다. 요시라가 김응서의 경상우병영을 방문한 것은 두 사람이 이미 여러 차례 만나 잘 아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응서는 두 해 전인 1594년 11월 22일 지금의 경상남도 함한 지곡현에서 소서행장과도 직접 만나 강화 회담을 가진 바 있었다. 비록 그 강화 회담은 소득 없이 끝났지만, 그 이후 김응서는 조선과 소서행장 사이를 잇는 대화 통로가 되었다.
요시라는 김응서에게 '1∼2월 중으로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너 옵니다. 조선은 수전에 강하니 바다 복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하면 반드시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두 나라가 강화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가등청정이 관백(풍신수길)에게 자신이 조선을 쓸어버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귀국에서도 익히 아는 바가 아닙니까?' 하고 말했다.
일본의 이간책에 속은 조선 조정, 그러나 이순신은 음모를 간파12월 4일에 김응서의 보고를 받은 선조는 그 다음날인 12월 5일 '통제사(이순신)로 하여금 정탐군을 파견하게 하여 바다를 살피고 있다가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너오는 날 해상에서 요격하는 것이 상책'이라면서 '다만 가등이 오는 때가 정확하지 않으니 요시라에게 뇌물을 잔뜩 주어 정확한 날짜를 알아내도록 하시오' 하고 대신들에게 명령한다.
1597년 정월 초하루, 가등청정이 1월 중순에 바다를 건넌다는 소식을 김응서가 조정에 알린다. 선조는 '통제사와 경상우병사는 잘 협력해서 일을 성공시키도록 하시오. 결코 서로 공을 다투다가 대사를 그르쳐서는 안 될 것이오. 과인은 두 사람의 공로를 반드시 으뜸으로 삼겠소' 하고 당부한다. 물론 선조는 '적이 우리를 속여 기만책을 흘린 것인지도 모르니 마땅히 살피고 또 살펴야 할 것이오' 하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1월 2일 임금의 출전 명령을 받고도 이순신은 출전하지 않는다. 일본 측의 속임수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선조는 계속 출정을 명한다. 이순신은 왕명을 거부한다. 이윽고 1월 13일, 도원수 권율이 직접 말을 타고 한산도로 달려간다.
이때 가등청정이 1월 12일과 13일에 걸쳐 부산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선조에게 전해진다. 선조는 2월 6일 이순신 체포령을 내린다. 3월 4일, 이순신은 투옥된다. 하지만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도 부산 앞바다로 진격하지 않는다. 전함을 몰고 부산을 공격하라는 도원수 권율과 조정의 명령이 떨어져도 배를 출전시키지 않는다.
이순신이 거부한 부산 앞바다 출정 명령, 원균도 따르지 않아당시는 부산에서 거제도 북쪽 해안에 이르는 바닷가가 온통 적의 손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로 진격했다가는 앞에는 부산포의 일본 수군, 뒤에는 경남 해안선 일대의 왜성에서 몰려나와 배를 타고 달려온 일본 육군에게 앞뒤로 에워싸일 게 너무도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도 출전을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원균은 이순신만큼 강단이 없었다.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한 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라도 수군 장졸들과 전함을 지킴으로써 일본군에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려 했지만, 권율에게 끌려가 두 번 곤장을 맞은 원균은 결국 1597년 7월 5일, 모든 전함을 몰고 부산 앞바다를 향해 출발했다.
수군통제사를 부하 장졸들이 보는 앞에서 두 번씩이나 곤장을 때린 권율도 너무했지만, 이순신만한 배포를 보여주지 못한 원균도 나라의 운명을 생각해보면 아쉽고 안타까운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