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이 직접 그린 생가 조감도
이복웅
고은 시인의 생가 조감도다. 본인이 직접 그렸다고 한다. 비록 그림이지만 처음 보는 생가여서 흥미를 끈다. 지난 2000년 11월 21일 고은 시인 부부가 이복웅 군산역사문화원장에게 팩스로 보낸 것을 기자가 찍었다. 조감도는 군산문화원이 군산 개항 100주년(1999) 기념행사에 맞춰 고은 문학관(기념관) 건립을 추진했을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팩스를 보낸 사람의 영문 이름(KO UN & SANG WHA LEE:고은 & 이상화)이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은 1983년 5월 비밀리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다. 금실이 좋기로 소문났지만, 팩스도 부부 이름으로 보내다니 놀라웠다. 하긴 나이 일흔아홉에 첫사랑 시집(<상화 시편>)을 내고, '아내는 나의 헌법이자 유토피아'이라고 치켜세우는 시인이니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생가 본채는 부엌, 큰방, 작은방, 구석방에 바깥 아궁이가 딸린 전통 시골농가 모습이다. 사랑채는 끝방, 윗방, 큰방, 부엌, 외양간 등으로 이뤄졌다. 본채 뒤쪽은 대밭이다. 대밭 왼쪽 아래엔 감나무, 오른쪽에 방공호가 있다. 마루와 토방, 두 개의 굴뚝, 본채와 멀리 떨어진 뒷간, 사랑채 뒤편의 남새밭도 보인다. 무척 세밀하고 입체적이다. 정성도 엿보인다.
본채와 사랑채가 'ㄱ'자 모양으로 들어서 있다. 이는 광복 후 모습을 그리지 않았나 싶다. 고은 시인의 유년기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쌀밥은커녕 만주에서 들여온 썩은 옥수수나 깻묵조차 먹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다. 영양실조에 걸려 허덕였고, 밤하늘의 별들이 먹을 것으로 보였을 정도였으니 소가 없었을 터인데 외양간이 번듯하게 그려져 있어서다.
"해방 뒤 우리 집의 운세는 좀 나아졌다. 소와 쟁기 그리고 네 바퀴가 달린 달구지를 사들였고, 2, 3년 동안의 머슴까지 두어야 할 정도로 논이 늘어났다. (줄임) 나는 소가 노는 날에는 소를 데리고 나가 마을 중 뜸 언덕의 풀을 뜯기거나 소가 일하는 날에는 소의 꼴을 베러 바랑이(바랭이) 풀밭으로 가서 왜낫으로 풀을 베다가 손가락을 썸뻑 다치기 일쑤였다."- 1990년 10월 12일 치 <경향신문> 해방 당시에는 소달구지를 보유한 집이 100여 가구에서 한두 집 정도로 지금의 덤프트럭보다 귀한 존재였다. 따라서 시골에서 소달구지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트럭이나 다름없었다. 어린 고은의 아버지도 소달구지를 끌고 다녔다. 지게가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양의 퇴비나, 나무(땔감), 곡물 그리고 마을의 보리가마니를 면사무소 창고로 실어 날랐다.
고향집 건물들 흔적도 없이 사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