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도 학교짱도...아이들이 꺼낸 낙인의 기억

[사서교사의 하루 ⑧] 방과 후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으며 2

등록 2016.10.25 11:45수정 2016.10.2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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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못 노는 아이로 낙인 찍혔다는 이야기, 선생님에게 말썽꾸러기로 낙인 찍혀 아직도 조금만 실수하면 '또또' 라고 해서 또또야가 되었다는 이야기.
선생님은 <에드와르도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아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선생님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아이들은 그림책을 보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아이가 되었다가, 동생을 구한 친구가 되기도 하고, 가장 부지런한 아이가 되기도 했다.

그림책에서 다양하고 많은 상황이 나왔다. 그림책을 읽을 때 에드와르도 이후부터 모인 아이들 이름을 대입하면서 읽었다. 20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모여 있어도 한 번씩은 에드와르도 대역이 가능했다. 학생들은 자기 이름이 언제 나올지 몰라 호기심을 가지면서 그림책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관련기사: "낙인 찍힌 기억 있니?" 아이들의 침묵이 무거웠다. http://omn.kr/l6jc)

그리고 '낙인'에 대한 선생님의 진심어린 고백을 듣는 동안 애써 눈물을 참는 아이들도 있었고, 이미 눈시울이 붉어진 아이도 생겼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모두 생각에 골똘히 잠겼다. 수업을 하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집중을 할 때의 감정은 언제나 기쁨과 만족이 가득한 마음이다. 아이들은 나눠준 포스트잇에 바쁘게 펜을 놀렸다. 대부분이 숙연한 분위기 때문인지, 아님 너무 진솔한 내 모습을 들키기 싫어서인지 발표를 꺼렸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말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대신 발표해주기로 했다. 아이들의 이름도 적지 않은 포스트잇이었지만 누가 쓴 글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내 목소리를 대신해서 나가는 발표였지만, 내가 발표할 때 아이들 표정을 보면 금세 티가 나기 때문이었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먹깨비'라는 낙인이 찍혀 억울하다는 이야기,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못 노는 아이로 낙인 찍혔다는 이야기, 선생님에게 말썽꾸러기로 낙인 찍혀 아직도 조금만 실수하면 '또또' 라고 해서 또또야가 되었다는 이야기.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었지만 각자에게는 그런 일이 있어서 너무 힘든 일이 되었다는 것이 아픈 현실이었다. 한 사람의 포스트잇을 발표하고 나면 앞에 적힌 힘이 되는 이야기를 다같이 읽게 했다.

"사랑해", "네가 최고야.", "엄마, 아빠는 민찬이를 사랑해."(실명을 밝히지 않기로 했지만 들으면 힘이 된다는 말에 자기 이름을 적는 실수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벌써 한 달이 훨씬 지나버린 수업인데, 아직도 세 사람의 포스트잇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다들 76mm*76mm 크기의 포스트잇을 가득 채웠다. 세 아이의 포스트잇은 깊고 선명한 사연을 남겼다.

첫 번째 아이의 사연이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짱이었어.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지. 너무 좋았던 시절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4학년 말에 전학을 가게 되었어. 말만 하면 뭐든 들어주던 친구들이 내가 전학을 간다니 슬슬 나를 피하기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없는 사람 취급을 했어. 아이들은 그때까지 내가 무서워서 친구인 척 했던 거야. 난 그냥 무서웠던 놈이었어.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너무 충격이었지. 그리고 어떻게 됐냐고? 전학을 가서 주먹을 한 번도 휘두르지 않았어. 아직까지도.'

그 아이가 들으면 힘이 되는 말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두 번째 아이의 사연은 여학생의 이야기다.

'나는 학교에서는 정말 모범생이라고 알고 있어. 우리 00이 잘할 수 있지? 우리 00이만 믿는다. 하는 말을 많이 들어. 그런데 그것도 낙인인 것 같아. 사실 너무 스트레스 받거든. 나는 아직 그렇게 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매일 그런 말을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아. 그래서 집에 가면 내 동생과 자주 싸우고, 엄마, 아빠에게도 자주 대들어.'

이 여학생이 들으면 힘이 되는 말은 '괜찮아'였다. 우리 모두 괜찮다고 이야기해줬고, 난 그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마음속으로 이야기했다. '정말 괜찮아.'

세 번째 아이의 사연엔 의외의 내용이 있었다. 평소 글씨체를 알기에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전혀 튀는 아이가 아니었기에 왕따라는 단어가 적힌 포스트잇이 낯설기까지 했다. 너무 착한 척한다고 친구들이 왕따를 시켰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실내화를 버리고, 가방을 뒤집어 물건을 꺼내놓고, 책상에 욕을 써놓고, 사람이 할 짓인가 할 정도로 심각한 내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초등학교 이후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하고 지금은 학교를 재미있게 다니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모든 친구들이 "힘내"라고 힘이 되는 말을 진심으로 말했다.

그리고 모든 포스트잇을 구기기 시작했다. 구겨진 포스트잇을 하나씩 나눠주면서 둥그런 원 안에 쓰레기통을 가져다두었다. 아이들에게 이 이상한 행동을 설명했다.

"이 포스트잇이 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중요하지 않아요. 나의 것이면 내 손으로 직접 낙인 찍혔던 기억들, 아팠던 상처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겠어요. 친구의 것이면 대신 용기를 내어 버려주는 거예요. 지금부터 선생님 왼쪽부터 버릴게요. 버리면서 기억들도 같이 버리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수업을 마치고 나왔다. 아이들은 다들 무언가 결의에 찬, 무언가 행복에 겨운, 무언가 가슴 따뜻한 느낌으로 하나둘씩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어쩌면 내가 가장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진심으로 책을 읽어주고, 마음을 열어 자신의 이야기를 해줬다는 것만큼 교사로서 더한 기쁨이 있을까?

덧붙이는 글 청소년문화웹진 킥킥에 송고함.
#순천신흥중 #사서교사 #낙인 #상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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