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병제26사 73연대 1대대 1CAP 소대원들(뒷열 가운데 모자를 쓴 이가 기자다).
박도
나는 1970년 봄, 중대 부중대장으로 지내고 있던 중, 대대 직할 탄약작업소대장으로 발령이 났다. 이 대대 직할 소대는 일명 'CAP 소대'라고 불렀는데, 당시 우리 연대에서는 3개 소대 모두 외지 경계취약지대로 파견을 내보냈다. 그래서 군대에는 이런 파견 소대를 '특과'라 하였고, 파견 소대장은 그 지역사령관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1 CAP 소대는 한강 하류 심학산 동쪽 능선에 주둔했다. 이는 만일 한강 둑인 제1선을 무장 공비나 간첩들이 뚫었다면, 다음 그 경유지를 차단하는, 그들의 예상 거점 및 예상 통과지점에 잠복초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이 CAP 소대에 부임하고 보니 30여 명의 단출한 소대원으로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그런데 며칠 지나자 소대원들은 내게 왜 마을로 외출치 않느냐고 물었다.
그 얼마 뒤에야 알게 되었는데, 내가 부대를 죽 지키니까 그들이 마음대로 마을로 내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슬며시 마을 외출을 유도했던 것이다. 내 전임자 부산 동아대 출신 배아무개 소위는 저녁이면 거의 매일 마을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그 산 아래 마을은 동패리, 삽다리, 송포마을 등으로 그 무렵 가내 가발공장들이 마을마다 한두 곳 있었는데 거기에는 여공들이 득시글거렸다.
그는 거의 매일 밤 주막에 들러 술도 한 잔 하고, 그 가발공장을 기웃거렸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자연히 마을 청년들과 시비가 붙게 돼 결국 대민사고를 저지르고 후방으로 전출을 갔기에 내가 졸지에 그 후임이 된 것이다.
소대장이 마을에 내려가면 곧 분대장은 다른 마을로 내려가고, 이어 분대원은 또 다른 마을로 내려가기 마련이다. 소대원들은 그렇게 여러 달 보내다가 새로 온 소대장이 부대에서 꼼짝하지 않자 그들은 좀이 쑤셨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 보름 지나자 마침내 그들은 마침내 밤 마을 외출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나는 대신 그들의 스트레스를 발산할 방안으로 부대 연병장에 배구장을 만들어 날마다 시합을 하게 조치했다. 그렇게 대민 접촉을 차단하자 대민 사고가 근원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산중생활사실 산중부대 생활은 단조롭고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CAP 소대에서도 주간에는 경계병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병력은 모두 취침을 하고, 야간에는 경계초소 잠복근무로 밤낮이 뒤바뀐 생활이었다. 나도 부임한 처음에는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생활이 몹시 힘들었다. 무료한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막사 주변을 맴돌았다.
하루 24시간이 48시간이라도 되는 듯, 마냥 지루하고 따분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 청취도 신물이 나고 바람소리에도 신물이 났다.
주간에는 그런대로 시간이 잘 갔다. 새벽녘에 철수하는 잠복근무조를 맞아 군장검사와 일조점호를 하고 아침 운동, 세면, 조식, 청소, 오전교육 및 자유시간, 중식 등 일과시간표에 따라 시간을 메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저녁식사 후 잠복근무 조를 떠나보낸 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시간은 고역이었다.
입산 수도승도 한 달이 고비라더니, 나도 산중생활 한 달이 지나자 그만 산 사내가 됐다. 그렇게 지루하던 하루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나의 직속상관인 대대장에게 매일 아침에 이상유무 보고만 하면 특별한 간섭이 없었다.
그때 내가 체득한 가장 좋은 부하 통솔 방법은 솔직하고 담백한 처사가 최선이었다. 열 마디 훈시보다 나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했다. 상급자라는 권위의식이나 군림의 자세에서 벗어나 그들과 함께 고락을 나무면 소대원들은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열고 따르게 마련이었다.
각자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켜는 것이 그 집단이나 그 사회의 안정을 가져온다는 것을 그때 체험으로 알았다. 아마도 나라도 그럴 것이다.
부대 이동1CAP 소대장 부임 후 두 달이 지나자 어느 날 갑자기 또 부대이동 명령이 내렸다. 이번 부대 이동은 사단 내 우리 73연대와 75연대가 관할지역 교체 명령으로,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가래비라는 곳에 위치한 부대로 이동이었다. 부대 이동 배경에는 새로 부임한 75연대장은 손영길 대령으로 그분 끗발이 셌기 때문이라는 말이 유언비어처럼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