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레는 입원할 때 담당 의사로부터 "생사를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pixabay
솔레는 입원할 때 담당 의사로부터 "생사를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 기를 쓰고 한국에 오고자 했던 자신이 그렇게 어리석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세계문화유산인 보로부두르 사원이 있는 인도네시아 마글랑에서 농사를 짓다가 한국에 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10년 가까이 논농사를 지었다. 친구들은 도회지로 외국으로 떠난 시골에서 나름대로 많은 애를 써 봤지만 언제나 수익은 변변치 않았다.
농사라지만 볍씨만 뿌려놓으면 자라는 논에서 붕어와 메기도 길렀고, 논 위에 양계장을 지어 닭도 기르며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돈이 모이지 않았고, 가끔 이주노동을 갔던 친구들이 돌아올 때면 소외감이 들기도 했다. 결국 어렵사리 아버지로부터 허락을 받고 27살이 되던 해에 출국할 수 있었다.
사십여 일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고 퇴원할 때만 해도 뼈만 앙상하게 남아 일이나 제대로 하겠나 싶던 그였다. 하지만 처음 배정받은 회사에서 8년을 꼬박 일했다. 그 회사 사장은 솔레가 입원할 때 지급보증을 서고, 퇴원할 때는 병원비 전액을 선납해 줬던 생명의 은인 같은 사람이다.
"송장 치우나 싶었는데, 그래도 사람 하나 살렸으니 됐다"며 허허 웃던 사장은 당시만 해도 병원비를 한꺼번에 낼 형편이 못돼서 분할 지급을 약속하고 퇴원수속을 했을 정도로 형편이 궁했다. 안성에서 자동차부품업체를 운영하던 사장은 갑자기 닥친 세계경기 둔화로 생산 주문도 안 들어오고, 수금조차 되지 않아 부도를 걱정해야 할 때였다. 사장은 그런 형편에 지급보증을 할 때는 정말 막막했다고 고백했다.
"평상시 같으면 크게 신경 쓸 금액은 아닌데, 숨 한 번 크게 쉬고 결제해야 했지... 일하라고 데려 왔더니, 회사에 온 날 바로 벽에 손 짚고 비실대더니, 그냥 쓰러지더라고. 여기 저기 열흘 동안 병원 데리고 다닐 땐 정말 이러다가 송장 치우는구나 싶었지."계약서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생면부지의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던 솔레를 위해 사장은 백방으로 뛰었다. 경기가 좋지 않아 여윳돈은 없지만, 사람은 살리고 보자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주노동자쉼터를 소개받고 간병인과 행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회사의 터줏대감으로 남은 솔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