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중국 해적인 장보자(1786~1822년)의 상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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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언급된 것처럼 전성기의 백제가 중국 양자강 유역(상하이 근처)을 자주 침략한 사실이나, 9세기에 장보고가 당나라-신라-일본의 삼각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한 사실이나, 14세기 중반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상하이 앞바다의 한민족 해적들 때문에 고심한 사실 등에서 증명되듯이, 14세기 중반 이전만 해도 동아시아 해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민족은 한민족이었다.
그러다가 14세기 중반 이후로는 대마도 및 일본 해적 즉 왜구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때부터는 일본 옷 입은 사람들이 동아시아 바다를 활개 치고 다녔다. 물론 그 이전에도 왜구는 있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해상을 장악한 것은 그 이후였다.
왜구가 약해진 것은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 후반이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운동이 전개되면서, 왜구의 상당부분이 정규 군사력으로 편입됐다. 이것은 16세기 후반에 왜구 활동이 격감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다. 그렇게 정규군으로 편입된 전직 왜구들을 한 자리에 모은 장(場)이 바로 1592년 임진왜란이었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16세기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이 동아시아 바다에서 힘을 자랑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자연히, 한반도 근해까지 와서 불법조업을 할 일도 별로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한민족이나 왜구 해적선한테 붙들려 돈을 뜯기고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감히, 조직적으로 서해에 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17세기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바다를 주름잡던 왜구들이 감퇴하면서 일종의 권력공백 상태가 생기고 이 틈을 타서 중국 해적들이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9세기 전반까지는 정성공·정일·장보자 같은 중국 해적이 동아시아 해역을 지배했다. 서양 군함이 이곳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까지는 그랬다.
이렇게 중국 해적이 기승을 부리면서 함께 나타난 현상이 중국 어선의 조선 근해 불법조업이었다. 음력으로 숙종 29년 9월 21일 자(양력 1703년 10월 31일 자) <숙종실록>에 따르면, 그런 현상이 극심해진 것은 1690년대 후반이었다.
중국 어선들은 서해 연해에서 물고기만 잡아간 게 아니었다. 조선 수군이 안 보이면 해안에 정박해서 마을을 침략하기도 하고, 사람과 가축한테 해를 끼치기도 했다. 중국 어민들이 해적으로 돌변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황당선에 대처하는 조선의 자세는 '황당'했다연해에서 불법행위를 일삼는 그런 중국 어선들을 조선 정부는 '황당선'이라고 불렀다. 거칠 황(荒), 당나라 당(唐)을 써서 그렇게 불렀다. 당선(唐船)은 중국 선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황당선은 그런 중국 선박 중에서도 불법행위를 일삼는 선박들이었다.
황당선에 대한 조선 정부의 해법은 상당히 무기력했다. 황당선이 나타나면 노잣돈과 식량을 주어 돌려보내고, 단속과 처벌은 중국 정부에 부탁했다. 청나라와 동맹을 맺고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미국 선박을 대하듯이 그렇게 청나라 선박을 대해야 했다. 그래서 청나라 정부에 단속과 처벌을 떠넘겼던 것이다. 조선 정부의 해법은 이 정도로 황당했다.
청나라 정부는 말로는 걱정 말라고 했지만, 자국 연해에서 생기는 일도 아닌데 열성적으로 단속할 리가 없었다. 조선 정부가 부탁을 하면, 그때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흐르면, 중국 어선의 조선 침탈이 다시 극심해지곤 했다. 나중에는 참다못한 조선 정부가 군함을 동원해 중국 어선을 추격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중국 어선이 워낙에 빨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히 여름만 되면 조선 연해에 눌러 살았다. 물고기도 잡아가고 연해 지방에 해도 끼쳤다. 조선인들의 밥상에 올라와야 할 어류는 그로 인해 청나라 사람들의 밥상에 올라가고, 조선 어민들의 생활고는 그 때문에 더욱 더 심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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