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극장 미림 2층에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
고제민
"내가 이런 걸 하는 거 알고 선배가 우리 극장에 와서 영화 좀 돌려줘야겠다 그래요. 짓기만 하면 하겠다고 했지. 군대 가기 전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휴가 때마다 나와서 봐도 아직 멀은 거야. 돈이 없어서 찔끔찔끔 짓다 보니까. 전역할 무렵 가보니까 어느 정도 완성이 됐더라고요. 장내 의자랑 영사기만 놓으면 된대요." 다 된 것이었을까.
"안 된 거지. 의자랑 영사기가 핵심이거든. 극장에 장내 의자가 없고 영사기가 없으면 어떡해요. 그걸 여적 준비 안 하면 어떡하냐, 3년이나 걸리지 않았느냐, 서두르자 해서 의자랑 영사기를 외상으로 들여놨어요.
극장에 전기도 없었어. 그거 놓는 게 비싸거든. 세운상가에서 발전기를 하나 사다 놨어요. 발전기로 영화를 튼 거야. 고생 무지하게 했지. 군대 갔다 와서 군인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했지, 못 해요. 또 선배가 하는 거니까, 죽어도 일으켜야겠다 하는 마음이 있었지. 아침에 나가서 밤 10시, 11시까지 발전기를 돌리는 거야. 매일 돌리니까 시동도 잘 안 걸려. 집에 가면 잠이 안 와. 내일은 걸리려나... 영화는 11시에 시작하는데 8시에 극장에 나가서 시동을 거는 거야. 일단 걸어놓으면 그날 영화 상영하는 데 큰 지장이 없거든. 그런데 1년을 견뎌보니까, 툭 하면 의자 업자가 와서 돈 안 준다고 의자를 죄 접어놓고 틀 떼어가고. 영사기도 못 돌리게 해서 영사실 문 잠그고 영사기 창에 불빛만 나가게 하고 창 밑에 숨어 있고 그랬어요."포도밭, 복숭아밭이었던 곳을 밀고 경지정리한 자리에 극장 건물 달랑 하나 있었다. 손님도 별로 없었다. 극장은 안 되고, 줄 돈은 많고, 그는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았다. 의리상 버텼지만 빛이 보이지 않았다. 1972년, 다른 선배의 권유로 미림극장에 오니 이곳에는 손님이 너무 많았다.
"영화가 좋으니까 손님이 넘치는 거야. 사장이 미군 수석통역관이었어요. 외국 서적 들여다보면서 어떤 영화가 좋은지, 흥행실적은 어떤지, 유럽은 어떻고 미국은 어떻고를 연구해서 좋은 영화를 잡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지. 영화 볼 줄 아는 사람은 미림극장에 가면 된다는 걸 다 알고 있었어.이 근처가 다 하꼬방이었잖아. 보고 즐길 게 영화밖에 없었지. 영화비가 아주 싼 건 아니지만 하루 놀러가서 돈 쓰는 것보다는 싸니까. 우리는 환히 알아. 저 새끼가 어제 왔는데 또 왔네, 여자 옆에 앉아서 영화 보려고 오는 것도 알지. 세월 지나고 보면 여자랑 손 붙잡고 다니고, 결혼하고...결혼해야 하는데 극장을 빌려줄 수 없냐, 그래요. 영화상영이 11시부터니까 11시 이전에 결혼식을 하는 거야. 조화로 화환 만들고, 간판실에 부탁해서 누구누구 결혼식이라고 써서 붙이고. 비용도 안 받았지. 자주 오는 친구들이라 얼굴 아니까 거절도 못했지."동네 꼬맹이도 다 아는 '조 기사'그는 반세기를 극장에서 생활했다. 인천은 살기 괜찮은 곳이었다. 서민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체질에도 맞았다. 당시 동인천은 그 어느 지역보다 교통도 좋았다.
이 동네(동구 송현동)에서 '잘 먹히는 영화'는 이소룡이 나오는 액션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액션보다 서정적인 영화를 더 좋아했다.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 같은 영화. 남자의 고향에 갔다가 그가 유부남인 걸 알게 된 소피아 로렌이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주변이 온통 노란 해바라기 밭이다. 기차 안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던 여자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최근에 블루레이도 구해 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