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린 정류장에 도착한 심야 버스 출국과 입국 때마다 차에서 내려야 하고, 또 차 안의 커피머신 소리 때문에 거의 뜬눈으로 지샜다.
권응상
퀭한 눈을 비비며 첫발을 디딘 탈린의 모습은 비교적 깔끔했다. 세수를 하기 위해 정류장 화장실로 갔다. 그러나 입구에 30센트 동전을 투입해야 바가 열린다. 여행 내내 화장실 인심이 정말 고약하다고 느꼈는데, 여기도 예외가 아니다. 루블에서 유로로 바뀐 화폐 단위에 센트 동전을 구하려고 자판기에서 초콜릿 하나를 산다. 초콜릿의 달콤함에도 씁쓸한 입맛은 잘 가시지 않는다.
정류장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데, 건너편에 익숙한 한국인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동양인 속에 섞여 있어도 이상하게 우리나라 사람은 표가 나는데, 쌍둥이 여학생이라 더 눈에 띄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작된 6개월 예정의 배낭여행이란다. 지난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서 만났던 여학생도 한 달 째 혼자 유럽여행 중이라고 했는데. 여자들이 훨씬 용감하다.
저만한 나이부터 함께 했던 집사람이 '젊으니까 좋다'며 부러운 눈길이다. 괜히 뜨끔하여 우리 젊은 시절을 떠올려본다. 용기는 있었으되 여유가 없었다고 변명하며, "네 젊음이 네가 받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가 받은 벌이 아니다"는 소설 <은교>의 대사를 되뇌어 본다. 우리도 용기있는 중년이라고 자부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러운 용기이고 빛나는 청춘이다. 여사들도 같은 또래의 아들딸을 생각하며 이것저것 먹거리를 사다가 챙겨주며 조심해서 잘 다니라는 잔소리를 건넨다. 고마운 마음이 그렁그렁 묻어나는 큰 눈망울이 오래 만나지 못한 엄마를 생각하는 눈치이다.
에피소드 열일곱. 에스토니아 자동차 여행 렌트를 하기 위해 버스를 탄다. 러시아 유심칩이 작동하지 않아 구글맵을 이용할 수가 없다. 더구나 일요일 아침이라 거리는 한산하여 물어볼 사람도 없다. 렌트카 회사 주소를 들고 간신히 주소 근처까지 왔으나 통 보이지 않는다. 큰 건물 쪽에서 사람이 나오는 걸 보고 물어보니, 씩 웃으며 손가락을 가리킨다. 사무실에 가서야 그 사람이 웃는 이유를 알았다. 간판도 없이 두 평 남짓한 좀은 방에 책상 하나를 두고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어쨌든 찾았으니 다행이다.
그런데 풀커버리지 보험을 들었는데도 앞 유리와 타이어는 제외되니 별도로 이 보험도 드는 게 좋다고 은근히 협박이다. 빌뉴스에서 반납하므로 편도비 240유로와 추가보험 70유로에 세금 등을 합쳐 360유로, 보증금 250유로까지 결제를 하니 키를 건네준다. 검은 색에 우리나라 봉고 같은 사이즈. 모스크바에서 빌린 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도로 사정은 러시아에 비해 굿이다. 다시 정류장으로 가서 일행을 태우고 탈린의 올드 타운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