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륙 부모반민투위 위원장을 지낸 김 부회장의 아버지 김상덕 선생(왼쪽), 김정륙 부회장이 7살에 숨진 어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
김정륙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맡았던 아버지는 39살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대신하여 당시 9살, 7살, 3살인 아이들을 홀로 돌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어머니를 여의고 6개월 뒤, 겨우 세 살배기 막내 여동생이 영양실조로 숨지자 김정륙 부회장은 누나와 함께 이국땅의 고아원에 맡겨진다. 나라를 잃었다는 것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 온몸으로 겪은 김 부회장의 증언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 온다.
이들이 겪은 고난과 역경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겨레가 겪은 일'이라서일 것이다. 고아원 생활은 2년 간 이어졌다. 김정륙 부회장이 학령기가 되어 학교를 다녀야 하는 관계로 아버지와의 재회가 이뤄진 것이다. 아버지 김상덕은 임시정부의 문화정책 책임자로 특히 동포자녀의 한글교육에 열중하였다. 일제 패망 뒤에 동포 2세들이 겪어야 할 우리말과 글에 대한 고통을 염두에 둔 처사였다.
"1945년 봄 개학이 되자 민혁당에서는 학교에 교섭해 일요교실을 마련하여 어린이들에게 한글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일제의 패망을 내다본 임시정부가 제 나라 말과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한글교육을 서두른 것이지요. 한글 교실은 처음 보는 이상한 글자와 처음 듣는 이상한 발음소리에 여기저기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지요. 그러나 교육을 맡은 윤기섭 선생은 주말에 한글을 배우러 나온 것만도 기특해 귀엽게 봐주셨지요." 이때 한글을 배우지 않았다면 조국에 돌아와서 꽤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김 부회장은 귀띔한다.
꿈에도 바라던 조국의 광복, 여덟 살의 김정륙 부회장은 아버지와 함께 고국땅을 밟았다. 그러나 아버지를 포함하여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고난은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미군정에 이은 이승만, 박정희 정권은 사이비 민족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환경을 만들어버렸고 그 통에 진짜 독립운동가들과 후손들은 떠돌이로 나돌던 이국땅에서의 삶보다 못한 세월을 견뎌내야 했으니 이것은 아버지 김상덕의 비극이 아들로 고스란히 대물림되는 어이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