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방송공사 <하나뿐인 지구> '당신이 몰랐던 식용개 이야기' 방송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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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컵라면이 4개 합쳐 2990원에 파는 행사가 언제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당장 식당 메뉴에서 완전한 채식 메뉴를 찾기도 어렵다. 육식을 강요하는 구조 속에서 선택권이 좁다. 그러나, 이런 변명이 작은 실천부터라도 저변을 확대하는 시도조차 안 하는 순응주의까지 정당화시켜주지는 못 한다. 다들 육식을 해왔으니 앞으로도 진보는 필요 없다는 주장도 군중심리에 호소하는 오류다. 물론, 육식이 옳지 못할 여지가 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이 가정이 성립하면, 개고기를 그만 먹자는 논의는 좋은 출발이 될 수 있다. 도덕이란 결코 상식과 직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모든 윤리적 논의는,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잠정적 진리를 받아들인 채 시작해야 한다. 공반전 끝에 결론이 어떻게 나든 말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왜 먹는 것 가지고 그러느냐'고 단순 기호의 문제로 일축한다.
하지만 채식주의(채식만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믿는 신념 체계)는 결코 간단히 묵살할 수 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오늘날 동물신경학과 인지과학의 성과들은 척추동물들이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고(1차 의식) 그 의미와 가치도 어느 정도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본다(2차 의식). 동물해방론자들은 여기에 주목해 공리주의 윤리 입장에서 동물의 도덕적 지위도 인정하고 육식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논쟁의 여지는 있다.
'고통'은 과연 보편적인 도덕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고통이란 주관적인 심리 상태이므로 객관적인 측정과 비교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끼리도 서로의 고통에 완전하게는 공감하지 못한다. 칸트 윤리학자들은 도덕은 고통보다 더 높고 보편적인 차원에서 성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어떤 일이 고통스러워도 '단지 중요해서' 희생을 감수할 때도 있는데, 이는 인간의 삶이 단순한 고통 이상이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나름대로 일리 있다.
그러나 칸트 윤리학자들조차 고통도 때때로 도덕적인 가치가 있고, 인간의 사소한 이익(입맛) 때문에 동물에게 과도한 고통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동물해방론의 기본 입장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개 농장뿐 아니라 소·돼지·닭 등을 대상으로 하는 공장식 축산 방식도 마찬가지다(관련 기사:
눈앞에서 동생이 죽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고통도 때때로 고려할 가치가 있다는 이 믿음. 도저히 포기하기 힘든 이 믿음의 뿌리는 뭘까.
해묵은 '개고기 딜레마'... 이중잣대론 피하는 전략나는 동물인정론자다. '동물인정론'이란 이름은 내가 독자적으로 짓기는 했지만, 알고 보면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크고 작은 동물인정론자들이다. 나는 '동물의 고통도 인정하라'는 동물해방론, '동물의 권리도 인정하라'는 동물권리론, '동물 복지의 필요성도 인정하라'는 동물복지론이 본질적으로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고 믿는다. 동물이 처한 나름의 맥락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는 똑같은 말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강조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동물인정론의 입장을 취할 수만 있다면, 해묵은 '개고기 딜레마' 앞에서 모순 없는 태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늘 논란은 '당장 소·돼지·닭 등은 먹으면서 개는 먹지 말자는 주장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에서 겉도는데, 나는 '아직까지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절충안이 성립한다고 본다. 동물인정론은 지금 당장 모든 동물을 해방시키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동물과 인간이 서로 인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시도해보며 점진적으로 영역을 확대하자는 입장이다(가령, 개·고양이→소→돼지→조류와 같은 방식이 가능하지만 순서는 문화권마다 다를 수 있음). 그러므로 개고기 딜레마로도 논리적 일관성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인정'이란, '상대의 맥락을 불충분하게 파악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마음을 쓰는 심리'다. 인정은 동물과의 관계가 아니어도 인간끼리도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태도다.
이러한 심리적 자질이 결핍된 사람들끼리 모인 곳은 진정한 공동체로 보기 힘들다. 서로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해준다는 신뢰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인정'이 도덕은 물론이고 사회 자체가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인 이유다. 그럼 '인정'은 도덕을 성립시키기에 충분한 조건이기도 할까? 그렇다. 상대의 맥락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상대의 고통·권리·복지 등도 도덕적으로 고려할 여지를 열어둔다는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