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농민은 70년대 반독재 학생운동와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향인 보성군 웅치면에 돌아와 농사지으면서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여 우리밀살리기, 우리농촌살리기 농민운동을 했다.
가톨릭농민회
늙은 농민 백남기. 전라남도 보성에서 밀밭 갈고 씨 뿌리고 나서 마을 농민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서울에 왔습니다. 11월 14일, 전국에서 상경한 농민 중 한 사람입니다. 손이 거칠고 대부분 주름이 깊이 팬 늙은 농민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밥쌀 수입 중단', '쌀값 21만 원 대선 공약 이행'을 소리쳐 외쳐보기라도 하자고 모인 농민 중 한 사람입니다. 쌀의 죽음, 농민의 죽음을 상징하는 상여를 매고 종로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물대포는 상여를 산산이 부서뜨렸습니다. 그리고 백남기 농민의 머리와 몸조차 부수었습니다.
정권에 의해 백남기 농민의 몸이 부수어진 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독재정권와 맞서 싸웠던 대학생 백남기는 학교에서 제적되어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청년 백남기는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수도원으로 도피하여 농사지었습니다.
80년 민주화의 봄에 수도원에서 나와 학교로 돌아온 청년 백남기는 5.18 광주 학살을 하며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군부 세력에게 잡혀 고문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감옥을 나와 농부가 되어 세 아이를 낳아 기르며 생명평화농사를 짓고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하며 사제의 길 대신 농부 성자의 삶을 올곧게 살았습니다. 그런 농민 백남기의 몸과 영혼이 살인 물대포로 산산히 부숴진 것입니다.
단양 산골 젊은 농민은 팔자에도 없는 비행기 타고 제주도로 가족 나들이 갔다가 SNS로 이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말문이 멎었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백남기 농민이 실려 간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당장 달려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비행기를 알아보았지만 표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이나 제주도에서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어쩌다 내가 저 자리에서 아버지 연배의 저 늙은 농민 대신 물대포를 맞지 않았는가?'하는 자괴감에 잠도, 식욕도 잃어버렸습니다.
사흘이나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와서 마늘, 고추, 참깨 판 돈 100만 원을 봉투에 욱여넣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백남기 농민 농성장이 차려진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전국에서 농민들이 모여 들고 있었습니다. 11월 14일부터 백남기 농민과 함께하고 농성장에서 밤을 세워온 선배 농민들에게 죄스런 마음을 주머니에 넣어온 봉투 하나 내밀며 대신했습니다.
그 마음을 담아 '젊은 농민의 호소'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보냈습니다. (관련 기사 :
백남기 선생 쾌유 농성장에 백만원 들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가자마자 정보과와 수사과 형사들이 두 차례나 집으로 찾아와서 채증사진이 있다며 11월 14일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했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날 제주도에 있었는데 홍길동의 분신술을 쓰지 않고서야 어찌 한날한시에 제주도와 광화문에 있을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사례는 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농민운동, 전교조, 진보정당, 진보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에게 저와 같은 사례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민중총궐기 국가폭력조사단에 제보하고 오마이뉴스 기사로 써서 세상에 알렸습니다.
아스팔트 위에서 보낸 날들, 참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