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한 약산 김원봉(1898~1958). 그는 일찍이 의열단을 조직하여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투쟁을 전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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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기에서 두 번째 질문을 던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약산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가로서 훈장을 받았을까요, 아닐까요?
바보 같은 질문이기에 누구나 답을 유추해 보셨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놀랍게도 약산은 이러한 독립운동 공적에도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가로 훈장 서훈을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약산은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 공적으로 그 어떤 예우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의열단 단장인 약산은 영화 <암살>과 <밀정>이 나오기 전에 거의 알려지지 못한 인물입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편입해 부사령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 분이 왜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을까요?
바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의 주도로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빚어진 비극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비극은, 이후 미국에 의한 미군정 체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후 조선의 점령군으로 이 땅에 들어온 미군정청장 하지는 곧바로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공직자로 재등용하게 됩니다.
하지가 친일반민족 세력을 등용하려 하자 주위에서 이를 반대하는 일부 양심적 목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당시 하지가 했다는 발언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일제의 이익을 위해 조국을 배신했던 자들이 다시 미국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하지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과거 일제하에서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친일세력들은 다시 해방된 조국에서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한 이들에게 사상범 죄목을 씌워 다시 체포해 고문하고 투옥시키는 등 참혹한 일을 벌였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이 참혹한 일은 불행하게도 약산 역시 비껴가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친일 반민족행위자였던 노덕술에 의한 치욕이었습니다. 1947년 4월, 약산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던 중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경찰서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이후 3일간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합니다.
노덕술은 친일경찰로 일할 당시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고문 기술의 70%를 완성한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노덕술 역시 의열단의 암살 대상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 노덕술에게 일제하도 아닌 해방된 조국에서 약산이 고문을 당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을까요?
다행히 약산은 이 사건 당시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노덕술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고 경찰서를 나왔지만 이후 사흘 밤낮을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내가 일제하에서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저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이런 수모를 당한 일에 대해 억울하다"라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약산 김원봉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바로 광복 후 좌우합작운동을 하던 몽양 여운형 선생의 암살 사건이 그것입니다.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대립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에 암살당했습니다.
약산은 이 사건을 접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 역시 암살당할 것'이라는 위협이 점점 약산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1948년 4월, 약산은 백범 선생님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그대로 북에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