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미 그린 달빛>의 김병연. KBS
김종성
어릴 때부터 '싹'이 보였던 홍경래현재 <구르미 그린 달빛>은 1820년대 초반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부터 반세기 전인 1771년. 영조 임금이 죽기 5년 전이었다. 평안도 용강군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홍경래가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학업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집안 형편에 관계없이 실력을 앞세워 출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선생님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내쫓겼다. 초년에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스승은 외삼촌 유학권이었다. 유학권이 보기에 홍경래는 조카이기 이전에 탐나는 제자였지만, 탐나는 제자이기 이전에 위험한 불순분자였다. 열 살 전후에 지은 시에 "산에 걸터앉아 강물과 발과 허리를 씻겠다"라거나 "가을바람이 불므로 장사의 주먹으로 백일 안에 임금의 머리를 노리겠다" 같은 표현이 있었다.
시를 본 유학권은 무서운 생각이 들어 홍경래를 집으로 돌려보내며 "내일부터 그만 나오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종의 가정통신문을 손에 쥐여주었다. "경래는 공부는 잘하지만, 생각이 불순하니 주의를 요한다."
외삼촌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생원 혹은 진사(향시)시험의 1차만 합격한 채, 그러니까 생원이나 진사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 상황에서, 홍경래는 서른 즈음인 1800년경 혁명을 목표로 방랑길에 나섰다. 김삿갓의 방랑이 있기 전, 그의 방랑이 있었던 것이다.
운명학과 풍수지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홍경래는 그걸 도구로 돈을 벌면서 각지를 유랑했다. 이때 만난 상인과 부자 상당수가 훗날 거사에 자금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유랑은 혁명을 위한 유랑이었다. 이렇게 해서 1812년, 저 유명한 홍경래의 난이 벌어졌다. 물론 그는 그것을 '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종 역사 서적이나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홍경래의 난이 1811년에 발생했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1812년이다. 음력으로 순조 11년 12월 20일자(양력 1812년 2월 2일자) <순조실록>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날은 음력으로는 순조 11년 12월 18일, 양력으로는 1812년 1월 31일이다.
이런 오류는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할 때 아주 흔하게 발생한다. 음력으로 순조 11년 11월 16일까지는 양력 1811년에 해당하고 음력 11월 17일부터는 양력 1812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순조 11년을 무조건 1811년으로 바꾸다 보니까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