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한산도 선착장에 도착한 여객선이 보이는 풍경. 선착장에서부터 대첩문까지 바닷가 아름다운 평지 길이 이어진다.
정만진
최초의 승전 기록은 용궁현 기사보다 닷새 뒤인 5월 20일자 <선조실록>에 나온다. 이날 비변사는 "해유령(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싸움의 승리에 대한 논공행상은 마땅히 그 주장(主將, 최고 지휘관)이 등급을 문서로 보고한 뒤라야 시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격장 인천부사 이시언(李時言)은 지난번 장수원(의정부시 호원동) 싸움에서 힘껏 싸워 진을 뚫었었는데, 이번에 또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병을 3명이나 죽였으니, 우선 당상관(정3품)에 특별히 가자하시어 싸움에 나간 병사들의 사기를 격려하소서" 하고 선조에게 아뢴다. 물론 선조는 이에 동의한다.
해유령 전투에 이어 등장하는 승전 소식은 <선조실록> 1592년 5월 22일자에 실려 있는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의 기사이다. 이날 비변사는 "원호는 여주 싸움에서 심상치 않은 승리를 거둔 듯하지만 왜적의 머리를 베지 못하고 왜적의 물건만 올려보냈으니, 가짜로 꾸민 일은 아닐지라도 일일이 시상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조방(助防, 병마사를 도와서 지킴)하라는 명을 받고 이렇게 승리 소식을 보고해 왔으니 그의 마음을 서운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성상께서 짐작해서 상을 내리소서" 하고 선조에게 말한다. 그러자 선조는 "아뢴대로 하라, 원호에게 가자하라" 하고 답변한다.
세 번째 승전 기사의 주인공은 이순신이다. 1592년 5월 23일자 <선조실록>은 '전라수사 이순신이 수군을 동원해서 경상도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머리를 베었으며, 빼앗겼던 물건을 되찾은 것이 매우 많았다, 비변사가 상을 내릴 것을 청하니, 상이 가자하라고 명했다'라고 증언한다. 날짜와 파괴 적선의 숫자로 볼 때 이 내용은 5월 7일의 옥포(거제시 옥포동) 승전(적선 26척 격침), 옥포 승전과 같은 날 이루어진 합포(창원시 산호동) 승전(5척 격침), 그 다음날인 5월 8일의 적진포(고성군 거류면) 승전(11척 격침)을 아우른 기록으로 보인다.
6월 11일자 실록에는 '좌의정 윤두수,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김진(金珍)에게 강변의 토병(土兵, 지방의 군사) 백여 명을 인솔하고 강을 건너가 왜적의 군영을 치게 하였다'면서, 이때 '적군들이 한창 자고 있었다, 김진 등이 수백여 명을 사살하고 말 133필을 빼앗아 돌아오던 중 (마중 나간) 배가 한꺼번에 도착하지 않는 바람에 토병 30여 명이 왜적에게 추격당해 빠져 죽었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승전했다는 것인지 패전했다는 것인지 애매한 기사인데, 김진에게 상을 준 기록은 6월 22일자 실록에 나온다.
왜적 한 명 죽인 것까지 임금에게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