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진 작가의 <조국과 민족>(상.하) 표지.
비아북 제공
'조국과 민족'이라는 말은 내 평생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그만큼 신기하지도 생소하지도 않은 말이었는데, 어느 날 들어야 했던 '조국과 민족'은 내게 예사롭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보안사 직원들이 건배사로 외친 "위하여"
1984년 1월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내 의사와 무관하게, 아니 오히려 거절하는 나와 내 처의 의사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보안사에서 강제 근무를 시작하였다. 훗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이러한 나의 처지를 '노예적 구속'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하였다.
하여튼 어느 외근계의 회식에 참석하라는 말을 듣고 강남의 고깃집에 갔을 때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술잔을 들어 "위하여!"라고 했다.
지금은 흔히 쓰는 말이지만 보안사에 잡히기 전까지 학생 신분이었던 나에게 '위하여'는 낯선 단어였다.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30년 전에는 그리 흔하게 쓰는 말이 아니었다. 건배면 건배라고 할 일이지 '위하여'라니, 대체 뭘 위하는지가 궁금해서 옆자리 직원에게 물어봤다. 대답인 즉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것이었다.
그날은 의대에 다니다 오랜 불법 감금과 모진 고문을 거쳐 간첩 용의자로 만들어진 교포 유학생을 회유 차원에서 면담해보라는 대공처장 최경조의 지시로 그를 만났다가 그 교포 후배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내 무력함을 개탄해야만 했던 날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 단지 재일교포 모국 유학생이라는 죄 아닌 죄로 지옥을 헤매는 힘없는 존재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술잔을 기울이는 악마의 대조가 나를 사로잡았고, 이는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조국과 민족'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당시 보안사가 해마다 검거했다며 언론에서 떠들어댄 간첩은 주로 교포 유학생 위장간첩과 납북귀환어부 간첩이었다. 어부에 대해서는 내가 소속된 사령부에서 몇몇 수사관이 예하 부대로 파견나가 사건을 만들었기에 어떤 수사를 했는지 자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사령부에서 다루던 사건은 웬만하면 알 수 있었다. 그 사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조작된 것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한국어를 모르는 교포를 위해 통역원으로 동원됐는데, 생각해 보면 이것도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한국어도 못하면서 어떻게 간첩질을 한단 말일까? 북한 쪽에서도 통역을 써가며 지령을 내리고 통역을 통해서 보고를 받았단 말일까? 하여간 밤낮없이 간첩 조작에 힘쓴 수사관의 노고는 진지했을지 모르겠으나 이는 더없는 코미디였다. 그 코미디를 정당화하는 전가의 보도가 '조국과 민족'이었다.
다행히 1970~1980년대에 검거된 '간첩'은 최근 거의 다 재심 무죄가 확정되었거나 재판에 계류 중이다. 당연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