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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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1일 헝가리 소설가 임레 케르테스가 지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얻은 지 14년 만이다. 본인이 겪은 실제 홀로코스트 생존 경험을 바탕으로 '아우슈비츠 이후의 문학'을 정립했다고까지 평가받는 케르테스, 그의 첫 장편 <운명>은 그의 소설 가운데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소설은 15세 소년 죄르지 쾨베시가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 자이츠 수용소에서 경험한 일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살던 14살 소년 죄르지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버스에서 끌려나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 수용되고, 독일이 패망하기까지 1년여간 부헨발트와 자이츠 수용소를 거치며 온갖 절망스런 경험과 마주한다. 그는 독일이 패망하고 부다페스트로 돌아와 한 저널리스트와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수용소 안에도 삶이란 것이 존재했으며 자신은 그로부터 일종의 행복까지 느꼈음을 증언한다.
<운명>의 특이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수용소를 완전히 비참한 공간으로 다룬 많은 작품과 달리 이 소설에선 그 끔찍한 장소에서조차 삶이란 게 있음을 내보인다. 죄르지는 잔혹한 노동과 폭력적인 규칙에 순응하며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집중한다. 그 삶이란 내일과 미래가 아닌 바로 이 순간을 극복해내는 것이다. 엄격한 관리를 통해 눈앞의 역경을 하나씩 이겨내고 그 가운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죄르지의 모습에서 독자는 운명과 행복, 자유와 극복 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되묻게 된다.
케르테스는 이 소설을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개인의 의지란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일깨운다. 모두가 쉽게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모든 운명 역시 개인의 동의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삶의 주인이 개인이어야 함을 역설한다. 곧 사회적 폭력이 개인의 종말을 강요하는 시대라고 해서 이를 운명이라 부르고 자신을 잃어가는 건 책임에 대한 비겁한 회피라는 주장이다.
나치의 아우슈비츠는 지나갔으나 전쟁과 독재, 각종 폭압이 상존하는 오늘, 케르테스의 소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소설에서 케르테스는 죄르지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운명없다>라는 원제가 더욱 솔직하고 와 닿는 이유다.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