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 장군이 마지막 순간 강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에는 그가 전투 중 활을 식히기 위해 열두 번 절벽을 오르내렸다는 열두대가 있다. 사진은 열두대의 커다란 바위, 뒤로 보이는 물은 북한강이다.
정만진
정오 조금 지난 무렵,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왼쪽을 공격하는 좌익대(左翼隊)는 종의지(宗義智, 소 요시토시)가 맡아 3천 군사를 이끌었고, 오른쪽을 공격하는 우익대(右翼隊) 5천 군사는 송포진신(松浦鎭信, 마츠라 시게노부)이 지휘했다. 중앙군 7천 명은 일본침략군 제1군 사령관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이 직접 인솔했다.
소서행장은 충주성 쪽 후미에 예비대 3700여 명도 주둔시켰다. 예비대는 유마청신(有馬晴信, 아리마 하루노부), 대촌희전(大村喜前, 오무라 요시아키), 오도순현(五島純玄, 고토 스미하루)이 나누어 맡았다.
종의지의 좌익대는 달천 오른쪽을 타고 진격해 오고, 우익대와 중앙군은 충주 큰길로 쳐들어왔다. 적은 남한강과 달천을 제외한 탄금대의 3면을 포위 공격하는 전술을 취하고 있었다. 탄금대의 북쪽과 서쪽은 강물이었으니 아군과 적 사이의 전투 예정지는 저절로 습지 또는 물기가 축축한 논으로 한정되었다.
말이 달리기는커녕 사람이 걷기도 불편한 땅이었다.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 신립의 기병군은 적의 조총 과녁이 되기에 아주 적합했다. 보병은 엎드려서라도 총알을 피할 수 있지만, 말을 타고 있는 기병들은 평지 위로 돌출해 있었으므로 적의 눈에 그대로 드러났다.
게다가 보병은 총알과 화살이 사람을 직접 관통해야 살상이 되지만, 기병은 말만 맞추어도 달리는 속도 또는 떨어지면서 깔리는 피해 등으로 반쯤 살상이 가능했으므로 훨씬 명중률이 높았다. 전투가 진행될수록 아군의 피해는 적의 손실에 비해 몇 갑절씩 늘어났다. 본래부터 군사의 수에서도 차이가 났지만, 죽고 다치는 인원이 증가할수록 아군의 수는 격감하고 적군의 수는 조금만 줄었다.
여러 차례 돌진 명령을 내렸던 신립도 이제는 전세가 기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직접 칼을 휘둘러 적군을 계속 참살했지만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다. 죽어 넘어지는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적군이 끊임없이 밀려 왔다.
자신의 주변에서 용감히 싸우던 아군 군사들은 어느덧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이미 충주목사 이종장이 외롭게 싸우던 중 적들에게 포위되어 목숨을 잃었고, 그의 아들 희립도 아버지를 돕던 중 장렬한 전몰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