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한강 하류 근무지에서 기자(1969. 12.)
박도
"중대장님, 한 이병 특별휴가 좀 보내주십시오.""안 돼요. 관보가 아닌 이상 보낼 수 없어요. 그런 편지 한 장으로 병사들 휴가 보내다가는 부대가 텅 빌 거요. 그냥 묵살해 버려요.""그냥 뒀다가 탈영하면 어쩝니까?""그건 본인의 책임이오."내 건의를 무 자르는 듯한 중대장이 야속했다. 나는 대도시 출신의 학벌 좋은 닳아진 녀석이라면 몰라도 시골 출신으로 약간 어벙해 보이는 한 이병의 경우는 그 모든 걸 진실로 믿었다.
나는 중대장에게 몇 차례 더 간청을 했지만 끝내 묵살되었다.
"
박 소위는 인정에 약하단 말이야. 그게 당신의 큰 흠이오."그 후 열흘 만에 그 소녀로부터 또 편지가 날아왔다. 종전의 내용보다 더 긴박했다. 나는 다시 그 편지를 들고 다시 중대장을 찾았지만 저번보다 더 듣기 싫은 핀잔만 들었다.
그 무렵 우리 중대 뒷산 심학산 OP(관측소)에 국방부장관이 시찰 올 예정이었다. 대대장은 장관이 온다는 예정일 이틀 전부터 아예 우리 중대로 출근하여 장관을 맞을 준비를 진두지휘했다.
그때 나는 선임 소대장으로 지시 사항을 착오없이 처리했다. 그러자 대대장이 나의 노고를 극구 치하하기에 바로 그 틈을 이용해서 한 이병 휴가 문제를 건의했다.
"그래? 그 자식 휴가 준비시켜 내일 대대 행정실로 바로 보내.""공격! 감사합니다."나는 마치 내가 휴기를 가는 듯이 좋았다.
그들의 연극에 속다이튿날 한 이병은 소대원들의 부러움 속에 휴가 차림으로 대대로 갔고, 다음날 명령지를 보니 보름간의 특별휴가를 떠났다.
그가 부대를 떠난 지 며칠 후 어느 날 밤이었다. 소대 내무반장 김무웅 하사가 내 방으로 와서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낯익은 글씨였다. 발신인이 바로 그 한 아무개 여인이었다.
"어쩐지 낌새가 이상하기도 했고, 혹시 그 사이 한 이병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나 하는 염려로 편지를 뜯어보았습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그가 한 이병 앞으로 온 편지를 나에게 주었다.
"본인 허락없이 편지를 뜯어보는 것은 위법인데….""글쎄, 저도 뜯지 않으려다가 한 이병이 이미 휴가도 간 터이고…."김 하사는 말꼬리를 흐렸다.
"사랑하는 OO씨…왜 안 오세요. 자기가 시킨 대로 소대장 앞으로 두 차례나 편지를 보냈는데, 그걸로 안 되나요? 자기가 휴가 올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려주세요.…."나는 그 편지를 더 이상 읽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한 이병, 너 귀대만 해 봐라. 내 그냥 두지 않을 거다. 영창? 아니 영창보다 더 큰 벌을 줄 테다. 나는 그를 우직스럽게 봤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철저하게 우롱 당한 셈이었다.
그의 귀대 일이었다. 아침부터 그에게 벌 줄 궁리만 했다. 온종일 분노가 삭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은 해가 지도록 귀대를 하지 않았다. 밤 9시, 10시……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불안해졌다. 내 귀는 온통 출입문에 쏠렸다. 11시, 그래도 인기척이 없었다.
제발 귀대만 해 다오 그날 야간 근무를 나가지 않은 소대원들은 모두 취침시켰다. 나는 내무반 옆 내 방으로 가서 램프를 켜둔 채 그때까지 근무복장 그대로 책상에 앉아 문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밤 11시 30분, 그때까지도 인기척이 없었다. 갑자기 초조해졌다. 이 자식, 미귀(未歸)하는 게 아냐? 그때부터는 그에 대한 분노가 불안감으로 바꿨다.
'내 벌 안 줄 테니 제발 오늘 내로 귀대만 해다오.' 그때부터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빌었다. 그새 중대 행정반에서 몇 차례 연락이 왔다. 대대 상황실에서도 한 이병 귀대 확인 전화가 왔다. 두 곳 모두 돌아오는 대로 즉시 보고하라고 했다.
새벽 12시 10분전, 그제야 인기척이 났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내무반장 김 하사와 전령도 그때까지 취침하지 않고 초조히 기다렸나 보다. 내무반장은 그에게 빨리 소대장실로 가서 귀대 신고하라고 일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가도 좋습니까?""들어 와!""공격! 무사히 다녀왔습니다."그는 경례가 끝나자마자 바지 주머니에서 청자 담배 한 갑을 꺼내 얼른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걸 그를 향해 집어던지며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그 순간 나는 이성을 찾았다. 내가 양보하자. 내가 참자.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런 연극을 꾸몄을까? 아무튼 그의 편지를 내가 엿본 것은 위법이 아닌가.
그 방법이 나빴지만, 뜨거운 사랑 앞에는 부모도 조국도 없다고 한다. 그 뜨거운 청춘남녀의 불 같은 사랑으로 인류의 종족이 보전되고, 또한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키지 않는가! 지금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귀대했을 것이다. 그의 꿈같은 휴가 여운을 이 밤에만은 깨뜨리지 말자.
"가서 자!""공격! 돌아가겠습니다."나는 EE-8 전화기를 돌려 곧장 중대와 대대 상황실로 한 이병의 귀대 보고를 하고 중대장 숙소로 전화를 돌렸다.
"공격! 중대장님, 한 이병 방금 돌아왔습니다.""그 자식, 촌놈이 보통 아니야. 귀대하는 날 밤 12시 직전에 들어온 걸 보니까. 어때, 박 소위! 그 자식한테 속은 거 아냐?""아... 아닙니다. 중대장님.""알았어요. 자, 그만 잡시다.""네. 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