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월 직전의 김홍기 일병(1969. 12.). 그도 살아있다면 이제는 일흔이 넘었을 것이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냐요?
박도
소대원 가운데는 대체로 학벌이 높을수록 눈치도 빠르거나 요령도 좋았고, 빤질빤질하게 말만 앞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김 일병은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순박한 '충청도 촌놈' 티가 물씬한 녀석이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몸매가 가냘픈, 눈이 유난히 큰 녀석으로, 전입 초부터 소대원의 식기를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자기가 도맡아 닦는 성실함을 보였다.
그가 나에게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파월 지원을 한 게 몹시 서운했다.
"어떻게 된 거야. 김 일병?""지가 중대 서무계 편에 연대 인사과로 파월 명령을 내려 달라고 손 좀 썼어유.""뭐? 김 일병이 손을 썼다고?""어디 맨 입으로 되나유."참 재미있는 나라다. 처음 파월이 시작될 때는 서로들 안 가겠다고 돈과 백을 썼다.
얼마 후 파월 장병들이 많은 전투수당을 받고, 귀국 때는 일제 캐논 카메라, 소니 녹음기 등을 갖고 와서 거드름을 피웠다. 그러자 그 무렵에는 파월지원자가 몰려 경쟁률이 높았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그래서 그 즈음 상급부대 인사 담당자는 한 철인 모양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펜대 놀리는 사람은 이래저래 뇌물이 들어오게 마련이었다.
"왜 지원을 했나?""이참에 외국 구경도 하고, 부모님에게 송아지 한 마리라도 사드릴려구유. 그동안 지 대학 입학금 마련한다고 집에서 기르던 황소를 팔았시유."이미 쏜 화살이었다. 나에게는 그의 파월 명령을 취소할 힘도 능력도, 그의 집에 송아지를 마련해 줄 수도 없었다.
"김 일병, 몸조심해라. 죽으면 말짱 헛일이다.""네, 소대장님 염려해 줘서 고맙구만유. 꼭 살아서 돌아올 게유."정부의 파월 명분은 '한국전쟁 당시 우방의 파병에 대한 보답과 세계 평화에 기여함'이었다. 하지만 파월 지원자들의 대체적인 동기는 그런 거창한 명분보다 촌놈이 언제 해외로 나들이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개중에는 이 참에 외국 구경도 하고, 내심으로는 한밑천 벌어 오겠다는 그런 물욕도 숨겨져 있었다.
게다가 당시 인기 가수 김추자가 부른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도 한몫 거들었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서 돌와왔네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굳게 닫힌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어린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모두 다 안겼네말썽 많은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달고 돌아온 김상사동네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모두 다 기웃기웃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동네 잔치하네폼을 내는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서요믿음직한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서요 월남 경기그들은 귀국길에 미군 P.X.에 들러 일제 카메라나 전자제품들을 아귀처럼 구입하여 휴대하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그때 그런 카메라나 전자제품을 구입치 않고 귀국한 병사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인들은 중간에서 피 한방을 흘리지 않고, 이 땅의 젊은이의 핏값을 가로챘다. 참 어처구니없었던 그 당시 월남 경기였다.
예로부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데 누가 거저 우리의 국군 장비를 현대화시켜 주고, 고속도로 재원을 조달해 주고, 가난한 농민에게 송아지를, 이 땅의 젊은이 어깨 위에 일제 카메라를 메어 주랴.
하지만 단순히 돈 때문에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드는 것은 비극이었다. 그 누구든 생명은 그 고귀하고 존엄한 것 인데….
나는 지금도 파월참전용사 얘기만 나오면 키가 후리후리하고 몸매가 가냘픈, 눈이 유난히 큰 김홍기 일병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그때 과연 무사히 귀국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