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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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만 이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입으로 음식물을 섭취하듯 누구나 아래로 싸기 마련이다. 이런 류의 '싸는 이야기' 한 꼭지 정도는 소장하고 있을 게다(특히 나처럼 예민한 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이걸 입밖으로 끄집어내느냐,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느냐일 뿐.
으레 이런 일은 명절이면 심각한 형태로 터지곤 한다. 명절이 선사하는 풍족함은 급변 사태로 귀결되곤 한다. 낱낱이 흩어진 식재료의 형태로, 누군가 뱃속에서 행주 짜듯 장을 쥐어짜는 고통으로.
그냥 홀로 배가 아픈 거라면 알아서 누면 된다. 하지만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건 쉽게 사태를 진정시키지 못할 주변 상황 때문이다. 특히 공간적 상황이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든다. 만약 처가나 시가에서 급변이 터진다면? 눈앞이 까마득해진다. 이동수단에서의 고통은 이동이 끝나는 그때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자리에서의 고통은 가족 내 위치 및 이미지까지 위협하게 된다(위 사례도 장모님 댁에 갔다가 급히 밖으로 뛰쳐나온 뒤 벌어진 일이다).
아무리 한 가족이라지만, 아직 배설음까지 공유하기엔 어색한 단계. 처가살이 혹은 시가살이에 어느 정도 노련한 경력이 쌓였다면 이 어색함을 뛰어넘을 수 있지만, 내공이 덜 여물었다면 아무래도 저어하게 된다. '일 처리'를 저어하다가는 추가로 한방을 맞게 된다.
"김 서방(여성의 경우 며늘아), 저녁 먹게. 천천히 많이 먹어"라는 장인·장모님(혹은 시부모님)의 목소리를 곧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끝없는 베풂은 끝없는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 4대강은 흘러야 하지만, 내 장 속 물결은 아직 흐르면 안 된다. 적절히 흐를 데서 흘러야 한다. 반드시.
난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