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일찍이 고려 시대부터 전국적으로 역도(驛道)가 조성되었다. 이 교통통신망은 조선 시대에 들어 더욱 발전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영남대로, 의주대로, 삼남대로 등의 9개의 간선도로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사방을 연결했다.
옛길을 개설한 목적은 본래 통치에 있었다. 그 후 산업이 발달하자 도로에는 다른 기능이 생겼다. 특히 중부와 남부 지방의 도로들에는 차차 민간 교역로의 기능이 부여되었다. 반면, 북부 지방의 도로는 변방의 경비나 사신 왕래 등을 위한 군사적, 외교적 기능을 담당했다.
당시에는 인구와 산업이 주로 한반도의 중부 이남에 치우쳐 있었다. 당연히 중부와 남부의 도로망이 북부 지방에 비해 더 조밀하게 짜여 있었다.
9개 간선도로의 대표적 길은 영남대로(大路)였다. 영남대로는 한양과 동래 950리, 27개 간로(間路, 샛길)를 이었고, 68개 읍을 통과했다. 이 길은 유곡역(문경) 아래에서 갈라져 통영대로가 되면서 550리, 10개 간로를 이엇고, 25개 읍을 지났다. 또 충청도에서 갈라져 경북 봉화로 가면서 5개 간로를 잇고 14개 읍을 통과하는 봉화대로 500리도 영남대로에서 나뉘어졌다. 영남대로 중 한양에서 수원까지는 특히 수원별로(別路)라 했는데, 100리, 1개 간로, 통과 읍 2개였다.
해남대로는 충청남도와 전라도를 관통하는 970리, 27개 간로, 통과 읍 65개로 이루어졌다. 해남대로 중 천안에서 갈라진 충청수영(충남 보령)별로는 210리, 9개 간로, 통과읍 18개였다.
이에 견주면 국경으로 가는 길은 상대적으로 단조로웠다. 강화대로는 160리, 2개 간로에 7개 읍을 통과했다. 경북 평해로 가는 평해대로는 890리, 7개 간로, 통과 읍 19개소였다. 한양과 (압록강) 의주를 잇는 의주대로는 1,065리, 32개 간로를 이으며 71개 읍을 지났다. 한양과 (두만강) 경흥을 잇는 경흥대로는 2,190리, 14개 간로를 이으며 41개 읍을 통과했다.
조선 시대에는 도로를 중요도에 따라 대로, 중로, 소로로 나누었다. 이들은 도로 폭이 달랐다. 대로 12보, 중로 9보, 소로 6보였다. 물론 지방마다 지형 여건에 따라 다소 다를 수도 있었다.
일정한 거리마다 돌무지를 쌓고 장승을 세워 사방으로 통하는 길의 거리와 지명을 기록해 둠으로써 도로 표지 기능을 했다. 주요도로에는 얇은 돌판을 깔거나 작은 돌, 모래, 황토 등으로 포장도 했다.
도로변에는 대략 30리마다 관리들을 위해 관(館), 역(驛), 원(院) 등의 숙박 시설을 설치했다. 또 여행자와 상인들을 위해서는 점(店), 주막(酒幕), 객주(客主) 등을 두었다. 현재 '원'이나 '점' 등이 들어 있는 지명을 쓰는 곳이 있으면, 그곳은 과거에 도로에 인접한 마을이었음을 나타낸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조선 시대의 교통통신 제도가 폐지된다. 또 철도를 비롯한 새로운 교통 수단이 등장한다. 이제 옛길과 길가 마을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말았다.
- 참고 : 옛길 박물관 내부의 여러 게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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