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룡 시집 <하멜서신>
천년의시작
1653년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은 풍랑으로 인해 제주도 근방을 표류하게 된다. 의도하지 않게 도착한 조선 땅. 1668년 제 나라로 돌아가기 전까지 15년간 하멜은 향수병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방인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열패감과 상실감. 시인 신덕룡은 이 '뿌리 뽑힌 자'의 심경을 한 권에 시집에 담았다. 이름하여 <하멜서신>(천년의시작).
이게 무슨 일인지 도대체 설명할 길 없습니다.누구 하나 눈길 건네는 이도 따라오는 기척도 없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가도 가도 언제나 제자리, 떠난 자리로 되돌아옵니다.- 위의 책 중 '풋잠에 들다' 중 일부.그렇다. 제 살던 익숙한 공간을 떠나온 자에겐 모든 것이 낯설다. 그래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고향을 타의에 의해 박탈당한 자의 서러움. 이것을 어떻게 필설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신덕룡은 푸른 눈을 가진 네덜란드인의 심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겪는 '고향 상실'의 곤혹스러움을 노래하고 있다.
30대 초반에 등단해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다가 지천명을 넘겨서야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덕룡의 시에서는 풋내가 나지 않는다. 젊은 시인들의 특장이라 할 패기와 결기가 부족한 건 흠으로 지적될 수 있으나, 대신 그에겐 시간이 농익힌 노장의 능수능란이 있다. 바로 그 힘이 지탱하고 있는 시집이 <하멜서신>이다.
그래서다. 신덕룡의 이번 시집에선 '미친 자의 지팡이' 혹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을 젊음을 따스하게 안아주는 문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귀향하지 못하고 실업의 나날을 살아가는 청년들, 부모를 만나도 웃을 일이 없는 20~30대를 다독이는 노래. 그것들이 명절을 서럽게 맞는 이들을 위무한다. 아래와 같은 시다.
활짝 열어젖힌 방문으로자울자울 밀려드는 흰 달빛들낫과 호미를 쥐고 누웠다. 베어낼수록 더 깊게 뿌리내리는 것들에 대해 골똘했다. 자꾸만 길을 잃었다.청춘이란 심장을 열어 주위에서 펄떡대는 모든 핏방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시기. 그러니, 그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가끔 아니, '자꾸만 길을 잃'어도 좋다. 그것은 청년만의 고통인 동시에 특권이기에.
위에 인용한 신덕룡의 시 '낫과 호미'는 실패와 절망은 잠시잠깐 길을 잃게 할 뿐이지, 길 자체는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은유적으로 일러주고 있다. 해서, 먼저 철든 이가 이제 철들어 가는 후배를 위해 부르는, 보기 드문 위로의 노래라 칭해도 좋을 듯하다.
회갑을 넘긴 신덕룡이 시에 관해 품은 가없는 젊은 열정을 본 동료 시인 염창권은 "누군들 생의 근원에서 들려오는 손짓에 목매지 않을까"라고 했다. 신덕룡에게 놓치면 아팠을 '생의 근원'은 시가 아니었을까?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기에 그리운 시절 <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