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12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못골종합시장에서 시민들이 전을 구입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이런 귀경길 교통지옥은 서울에 사는 동안 딱 두 번 경험했다. 그 강렬했던 두 번의 경험은 내게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있다. 올 추석은 귀촌한 이후 처음 맞는 명절이다. 처가까지는 자가용으로 25분, 시골집까지는 30분 거리다. 게다가 시골인지라 명절이라고 해도 도로가 막힐 염려가 없다.
그래서 일까. 올 추석은 명절이 코앞인데도 아무런 긴장감이 없다. 그저 고요하고 평화로울 뿐이다. 아무래도 이런 느낌은 더 이상 막힌 도로에서 귀경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듯하다.
명절은 운전자뿐 아니라 상차림을 주로 담당하게 되는 여성들에게도 고통이다. 특히나 젊은 여성들에게는 잘 먹지도 않는 명절음식을 필요 이상으로 만드는 일이 낯설고 힘들기만 할 것이다. 오죽하면 얼마 전 '홍동백서는 근거가 없다'는 내용의 기사까지 나왔을까.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차례상은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게다가 차례 음식은 가족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만들고, 그것을 나누어 먹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구색을 맞추느라 먹지도 않는 음식을 잔뜩 만들어 놓고 버릴 바에는 차라리 그게 더 낫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가족은 이미 수년 전부터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고 있다. 명절 음식도 가족끼리 모여 먹을 만큼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동태전이나 각종 전 종류는 조금씩 만들어 먹는데, 그 이유는 가족 중에 전 종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다.
선언하라, 역사가 바뀔 수도 있다 우리 가족이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내 어머니가 던진 한마디 말씀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어머니는 "나도 늙어 가는데, 이제는 더 이상 차례 음식 만들기가 어려울 것 같다"라고 호소했다. 이 말은 들은 나는 "그럼 안 하시면 되겠네"라고 답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맏며느리로 시집 와 평생을 시부모 수발로 보냈다. 조부모가 돌아가신 뒤로도 차례와 제사를 전담하다시피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필자의 집에서는 더 이상 차례와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됐다. 이렇게 되자 필자의 작은 아버지들은 알아서 제사 음식을 가져왔다. 그리고 조부모가 계신 납골당에 직접 찾아가 차례와 제사를 지냈다. 이처럼 때로는 누군가의 '명분 있는 하소연'은 집안의 분위기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덕분에 어머니는 그렇게 몇 년 동안 차례와 제사를 지내지 않고 편안히 지내셨다. 그러다 지난 2015년 설 명절 직후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어머니는 지금도 여전히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신다. 그때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어 주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어머니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하나뿐인 며느리와 함께 명절 음식을 만들고 치우시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단 몇 년일 뿐일지라도 어머니를 명절 스트레스에서 해방시켜 드린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잘한 일 같다. 어머니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다만 몇 년이라도 명절을 마음 편히 지내셨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머니를 명절 스트레스로부터 해방시켜 드린 것은 내 평생, 그것도 단 한 번 어머니를 위해 한 효도가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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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 이성애자. 윤회론자. 사색가. 타고난 반골. 충남 예산, 홍성, 당진, 아산, 보령 등을 주로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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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차례 음식 못 한다"... 어머니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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