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성 목사. 사진은 지난 2013년 제20회 한신상 수상 직후 5.18 항쟁 당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숨진 신학과 친구인 유동운 열사의 추모비에 찾아간 모습.
조호진
한신대가 소속된 기독교장로회는 김재준·문익환 목사, 안병무 박사 같은 진보적 목회자와 지식인들이 활동한 진보적 신학 및 신앙공동체로서 복음의 자유, 신앙양심의 자유, 자주·자립 정신 둥을 목표로 활동해온 교단이다. 사회개혁, 민주화, 인권, 민중생존권, 통일운동 등에 크게 기여해왔다고 평가받고 있다.
1960~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한신대는 김 목사가 입학한 이듬해인 1980년과 1981년 두 해 동안 신학과 신입생 선발중지처분을 받는 등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한신대 신학과 79학번은 모두 50명. 이 중에서 성결교 출신은 김 목사 외에 1명이 더 있었다. 그가 바로 전남 광주 출신의 유동운이었다. 김 목사가 성결교 특유의 보수적이고 원칙적인 신앙을 고수했던 반면, 유동운은 이미 고교 시절부터 긴급조치 위반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렸을 만큼 사회 참여적 기질이 뚜렷했다.
성격과 가치관이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은 절친한 관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 목사는 이를 "가장 가까우면서도 결코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과 같은 관계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유동운은 김 목사에게 평생의 부채로 남게 되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전남도청을 지키고 있던 유동운이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던 것. 계엄확대와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경찰의 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하던 김 목사에게 친구 유동운의 죽음은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개신교 목사들의 조찬기도회는 김 목사에게 신앙에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한국 교회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고 목사가 되겠다는 마음도 사라졌다.
한동안 흔들리며 방황하던 김 목사가 다시 희망을 품게 된 것은 1980년 11월 성남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한신대 출신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수십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새벽기도를 놓치지 않았던 이 목사를 그는 혼돈 속에 있던 자신에게 '참 길'을 알게 해준 인생의 은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담임 목사와 교육전도사로 처음 맺은 인연은 지금까지 36년째 이어지고 있다.
오른쪽 팔뚝 아래가 잘린 필리핀 노동자를 만나다
대학졸업 후 김 목사는 본격적으로 주민교회를 중심으로 성남 지역 사역에 매달렸다. 성남 지역의 특성상 교회 업무뿐 아니라 철거민, 노점상,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김 목사는 눈코 뜰 새 없었다. 1984년 주민교회의 결의에 따라 김 목사는 카메라 렌즈를 생산하는 공장에 취업했다.
현실의 노동은 매우 힘들었다. 주야 2교대 근무를 하면서 교회일과 지역 일을 같이하니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특히 야간작업은 피를 말리는 고통이었다. 이런 생활을 1년쯤 하다가 해고당했다. 이력서에 대학 졸업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됐다.
부당해고를 구제받기 위해 찾아갔던 노동부 근로감독관에게 김 목사는 "너 같은 새끼는 해고당해도 싸다"라는 말을 들었다. 공장에 노조가 설립되고 3년 동안의 투쟁을 통해 노동부로부터 복직명령을 받아냈지만, 끝내 복직하지는 못했다.
1986년 5월 1일 노동절에 개척교회인 산자교회를 설립했다. 교회 이름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성경 구절에서 따왔다. 이 시절 김 목사는 성남지역에서 '매 맞는 목사'로 통했다. 각종 시국집회나 시위의 맨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가 경찰과 충돌이 생길 때면 가장 먼저 폭행을 당했던 까닭이다.
그런 이유로 10여 차례나 병원에 입원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는 성남에 유세온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를 향해 "광주 학살 책임지고 노태우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가 경호원들에게 폭행당해 턱뼈에 심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이른바 '3D 업종'을 중심으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 대거 유입됐다. 성남지역에도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났고, 성남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김 목사에게도 이주노동자 인권운동을 함께하자는 제안이 왔지만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데다 짧은 외국어 실력 때문에" 그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이런 김 목사가 이주노동자 운동에 천착하게 된 것은 1992년 12월 한 필리핀 출신 노동자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성남지역에서 인권운동을 함께 하고 있던 이재명 변호사(현 성남시장)의 소개로 김 목사를 찾아온 필리핀 출신 불법체류자는 산업재해로 오른쪽 팔뚝 아래가 절단돼 있었다.
5인 이하의 영세사업장에는 산재보험이 적용되지 않았던 당시 보상금은 고사하고 병원치료비조차 갚지 못했던 필리핀 출신 노동자의 딱한 사연이 김 목사의 마음을 움직였다.
치료비와 보상금을 못 주겠다고 버티던 사업주는 형사 출신의 보험대리점 사장을 내세워 김 목사를 협박하려 했는데, 마침 이 보험대리점 사장은 과거 정보과 형사시설 주민교회를 담당했던 사람으로 김 목사와도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김 목사와 싸워서는 못 이긴다"는 전직 형사의 충고에 사업주는 두 손을 들고 순순히 치료비와 보상금을 내놨다.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김 목사를 찾아오는 이주노동자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주로 임금 체불과 산업재해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출범을 주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