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5월호 <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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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 유학생시절 2.8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직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등 나름대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잃지 않았지만 3.1운동이 일제의 폭압으로 좌절되자 조선의 천재라는 그 역시 제국주의 권력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상해로 찾아온 허영숙과 애정도피 여행을 떠나고 안창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1921년 그녀와 함께 귀국하여 결혼하였다. 당시 이광수는 여러 글에서 귀국하면 자신이 징역을 살 것처럼 썼으나 허영숙과 함께 온 그는 간단한 조사만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5월 허영숙과 결혼식을 올렸고, 9월에는 사이토 총독과 면담을 하는 등 화려하고 세속적인 출세가도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하여 결국 이듬 해 자신의 변절을 상징하는 <민족개조론>(1922)을 발표하여 조선청년들을 분노케 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인하여 소설가 박종화는 '이광수의 변절은 총독부의 밀정으로 파견된 허영숙 때문'이라는 논란을 제기했고 이것은 여전히 지금도 논쟁 중이다. 하지만 나는 허영숙이 밀정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이광수의 변절은 이미 그 전부터 그의 삶 속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본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일본 유학시절부터 그런 경향을 보여왔다.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조선침략의 선동가로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하여 이광수는 그야말로 "하늘이 일본을 축복해 내린 위인"이며, 자신 또한 '조선의 후쿠자와'를 꿈꿨다고 말했다.
이미 그에게 일본은 제국이 아닌 '연민의 대상'이며 '조선의 희망'이었을 뿐이다. 그런 이광수에게 허영숙이 없었더라도 그의 친일행위는 이미 예약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했기에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광수가 아니라 천황의 신민인 고야마 미타로(香山光郞)일 뿐이었다.
해방 후 이광수의 '친일옹호론'이랬던 이광수에게 조선의 해방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까? 아마도 지옥같았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거세게 몰아치는 친일청산의 폭풍을 피해 일체의 작품활동을 중단한 채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에서 약 1년간 은둔하였고, 1946년 5월 전처를 버리고 온갖 비난과 의심 속에서 재혼한 허영숙과 이혼을 한다. 이에 대하여 <서울신문>은 "장차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 아닌가 보고 있다"(1946년 6월 13일자)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