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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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고통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게 정당하다손 치더라도 고통이 '보편적' 기준이 될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필자) 맹 교수는 동물의 경험과 인간의 경험을 과연 동등한 비중으로 고려하는 게 가능하느냐고 묻는다.(맹주만, 2007:246) 최 교수는 맹 교수가 싱어를 오해했다며 싱어가 '대우의 평등'이 아닌 '고려의 평등'을 주장했음을 상기시킨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 가족까지 걱정하므로 (같은 조건일 때) 인간의 고통을 더 생각해야겠지만, 그게 동물의 이익도 고려하라는 원칙 자체를 무너뜨릴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익을 비교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적어도 동물을 죽여 인간이 얻는 이익이란 '입맛' 정도의 사소한 것에 불과한 건 명백하다.(최훈, 2009:202~204)
하지만 동물이 과연 인간처럼 고통을 느낄 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을까?(필자) 최 교수는 어떤 존재가 자신이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을 "2차 의식"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2차 의식은 감응력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도덕의 기준선을 위치시키지만 지능이나 합리성만큼 임의적이지는 않음을 인정한다.(최훈, 2009:207~208)
다만, 2차 의식을 도덕의 기준선으로 잡으면 인간 중에서도 2차 의식이 없는 존재들이(가령 유아나 식물인간) 문제가 된다. 또한 동물의 행동 등을 관찰해보면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과 동물의 행동이 비슷하다는(소리를 지르거나 발버둥 치거나 등등) 약한 유비 추론에서 성립된 상식이기는 하다.(최훈, 2009:208)
하지만 상식을 뒤엎고자 2차 의식이 있어야만 고통을 느낀다는 주장을 하려면 입증 책임은 주장하는 쪽이 져야 하고, 인간이 육식으로 얻는 (잠정적) 이익이 현존하는 동물의 고통을 능가하지 못하므로, "백 번 양보해도 싱어의 주장은 적어도 소, 돼지, 닭에 대한 육식을 반대할 행동적 지침은 분명히 제공해준다"는 게 최 교수의 결론이다.(최훈, 2009:208~210)
[생각해보기] 고통만으로 보편적인 도덕의 기준이 성립할까?최 교수는 감응력 외에 다른 정신 능력들이 왜 도덕의 기준선이 될 수 없는지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여전히 감응력이 독립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선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싱어와 최훈 교수의 지적처럼 식물은 중앙 집중적 신경 체계가 없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실증된 적이 없을 수도 있다.(필자)
하지만 최 교수가 맹 교수를 오해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맹 교수는 생명계에 다양한 특징들이 있음을 지적했는데, (싱어처럼 진화생물학적 유용성을 따지자면) 이것들로부터 식물에게도 고통과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창발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논리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 능력은 감응력과는 유사하지만 어쨌든 다르다.(필자)
이 능력은 감응력의 증거인 "중앙 집중적 신경 체계"의 존재로 실증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럼 정말 식물은 고통을 못 느낄까? 이것은 철학자들보다는 생물학자들이 답 할 몫이다. 오히려 윤리학의 핵심은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낄 수 있든 없든 간에 그런 '사실'이 곧바로 어떤 '가치'나 더 나아가 '당위'를 이끌어내는 기준이 될 수 있느냐다.(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