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자 김만권
참여사회
정치학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는 손수 출력해온 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지 압니다 / 우리가 아플 때마다 / 사람들은 선생님이 우리를 낫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 지난 십 년 동안 선생님께선 / 사람들의 돈으로 만들어진 근사한 학교에서 / 사람들을 치료하는 법을 배우셨다고 / 또 선생님의 지식을 위해 돈을 쓰셨다고 / 그렇게 들었습니다 // 그렇다면 선생님께선 저희를 낫게 하실 수 있겠지요 / 저희를 치료하실 수 있나요? (베르톨트 브레히트,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중에서)
시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몇몇 사람들은 같이 눈물을 글썽였다. 정치학 강좌에서 이게 무슨 일일까 싶기도 하지만 김만권 교수의 강좌에서는 종종 발생하는 풍경이다.
"왜 이렇게 자주 우세요?""그렇게 많이는 안 울었는데…. 호르몬 변화가 심한가 봐요. 하하하. 제가 좀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부분이 있어요."
호탕하게 웃는 그가 오늘은 우는 일 없이 인터뷰를 마칠 수 있을까?
거리의 정치철학자감성 충만한 그는 시인을 꿈꾸던 문학 소년이었다.
"원래는 작가 지망생이었어요. 대학을 진학할 때도 문학을 하고 싶었는데, 집에서는 법학을 전공하길 원했어요. 굉장히 비이성적이지만 그 둘의 타협점이 정치외교학과였어요. 큰 누나가 주고 간 잡지에 기형도 시인의 얘기가 실려 있었는데 그분이 정치외교학과 출신이더라고요. 여기 나와도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가게 됐죠."막상 들어간 대학에서 정치학 공부가 재미없었던 건 아니지만 시인의 꿈은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윤동주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는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인생의 방향을 정치학자로 옮겨 놓은 건, 대학원 지도 교수였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언론 코멘트도 하지 않는 지도 교수의 강직한 모습에 매료되어 '공부를 계속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그렇게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한창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그가 한국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이 활활 타오르던 2008년이었다.
"그때 마침 박사 논문으로 '초일상의 정치'에 대한 걸 쓰고 있었는데, 촛불이 터진 거죠. 뭔가 딱 맞았어요. 미국은 학기가 5월에 끝나거든요. 통장에 남아 있던 돈을 털어서 한국에 들어와서 집회 현장을 계속 따라다녔어요. 이 문제가 어떻게 전개되든 여기에 관한 책을 한 권 써보고 싶었어요."당시 광화문에 매료(?)된 건 김만권 교수만은 아니었다. 중고생, 아이 키우는 엄마, 하이힐 신은 여성 등 그동안 집회 현장에서 볼 수 없었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어떤 폭력 사태도 없이 두 달 간 집회가 계속되었다. 시민들의 정당한 의사 표현에 대한 고마움과 '거리 민주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정당화를 위해 쓴 책이 <참여의 희망>이었다.
"집회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놓고 논쟁이 많았는데, 당시 상황은 일반적 법률이 적용되지 않는 '초일상적인' 순간이에요. 시민불복종은 초법적 활동이기 때문에 합법·불법 프레임에 갇히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건 단순히 쇠고기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얼마나 자기 구성원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가의 문제잖아요."참여연대와 김만권 교수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책 덕분이다.
"<참여의 희망>을 쓴 이후에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시민불복종을 주제로 강좌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었어요. 근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한국에 다녀오느라 방학 중에 다시 들어올 돈이 없었거든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 강의 펑크 낸 거 갚으려고 '정의의 계보학' 강좌를 열겠다고 제안해서 하게 됐죠. 근데 참여연대에서 이렇게 오래 강의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진리를 탐구하는 학자이기보다는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지식인이길 원하는 그는 '부르는 곳은 어디든 간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다.
"(귀국 한 이후에)학교 강의는 생계를 위해 시작한 거였어요. 지금은 강의도 재밌고 좋아하는 활동이 됐지만, 진짜 하고 싶었던 활동은 시민 교육이었죠. 시민교육을 하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저도 많이 배우거든요. 보수단체처럼 생각이 다른 곳에 가서 욕도 먹고, 온갖 곳에 가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비슷한 사람들하고만 얘기하면 답답하진 않겠지만 편향적이 되잖아요."수많은 강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국방부 강연이다.
"강의를 듣던 군인들이 그러더군요. 지식인들이 할 일을 똑바로 안하니까 군인들이 대선개입이나 하고 있지 않느냐고. 자신들의 할 일은 정치개입이 아니라 국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여기서 강의한 이후에 저도 느낀 점이 많았어요."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왜 나는 의도치 않게 공익제보를 한 군인이 걱정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