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남서원으로 들어가려면 이 영귀문을 이용해야 한다. 문 왼쪽 뒤로 보이는 2층 누각이 정허루이다.
정만진
윤승훈은 선조에게 "경상도는 본래 유자(儒者, 선비)가 많기로 이름나서 상도(上道, 경상좌도, 특히 경북 북부)에는 이황이 있어 학문을 숭상하였고(學問相尙), 하도(下道, 경상우도, 특히 경남 서부)에는 조식이 있어 절의를 높였기 때문에(節義相高) 풍속이 볼 만하였습니다." 하고 말한다.
윤승훈의 말은, 이황 계열의 남인은 사람이 자신을 갈고 닦기(修己) 위해서는 인간의 도덕적 정신인 경(敬)을 학문적으로 궁리(窮理)하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조식 계열의 북인은 수기(修己)의 방법으로 경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실천의 문제인 의(義)를 매우 중시하는 특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 결과 임진왜란 때 경상도 일원에서 크게 활약한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 주요 의병장들은 대부분 조식의 제자들이었다. 이들이 한결같이 창의에 앞장선 것은 '정자와 주자 이후의 학자들은 (두 분이 이미 성리학의 이론을 모두 규명하였기 때문에) 책을 저술할 필요가 없다'면서 '손으로 물 뿌리고 마당 쓰는 일도 못하면서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도명기세(盜名欺世, 이름을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임)'의 행위를 하지 말라는 스승 조식의 가르침을 제자로서 실천에 옮긴 '의'였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나면, 전쟁 중 생명과 재산을 나라를 위해 바친 대의명분에서 앞선 북인들이 권력을 잡게 된다. 북인들은 류성룡을 혹평한다. <선조실록> 1607년(선조 40) 5월 13일 기사는 그 사실을 보여주는 아름답지 못한 증거의 하나이다.
당일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류성룡은 (앞서 언급된 칭찬 부분은 생략) 사람됨이 조금 좁고 마음이 굳세지 못해 이해가 눈앞에 닥치면 흔들렸다.'면서 '따라서 임금의 신임을 얻은 지 오래되었지만 바른 말을 했다는 평판이 없고, 나랏일을 결정하는 데 큰 권력을 휘둘렀지만 나빠진 풍습을 구하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다.
또 '기축년의 변(1589년 정여립 사건) 때 (중략) 착한 사람들이 잇따라 죽었는데도 일찍이 한 마디 말을 하거나 한 사람도 구제하지 않고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면서 구차하게 몸과 지위를 보전하기까지 하였다.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는 (중략) 화친을 극력 주장하며 통신(通信, 일본과 대화)하여 적에게 잘 보이기를 추구, 원수를 잊고 부끄러움을 참게 한 죄가 천고에 한을 끼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의사(義士)들이 분개했다.'라는 참담한 문장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