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작도리깨 타작
전새날
도리깨는 종일 작업을 하려면 가볍지 않으면 안 되고, 계속해서 세게 때려 대는 것이라 질기지 않으면 안 된다. 대나무와 물푸레나무가 날개 재료로 쓰인다. 곧고 가볍고 질긴 것으로는 대나무가 좋지만 대나무를 구하기 어려운 지역 사람들이 물푸레나무를 쓴다. 그렇지만 도리깨 기둥으로는 대나무 아니면, 배게 자라서 키다리가 된 소나무를 잘라서 말려 썼다.
도리깨 기둥의 끝에는 구멍을 뚫어서 도리깨 날개 축(도리깨꼭지)을 끼워 넣어 날개가 잘 돌게 만든다. 마찰열을 줄이기 위해 회전 부위에 수초를 집어넣기도 한다. 솜씨 좋은 상일꾼들은 도리깨 날개를 수직으로 뒤로 넘기는 '고개 넘기기'라는 고난도 기술로 타작하고, 초보 일꾼은 단순 타작을 한다. '고개 넘기기' 타작은 타격 강도가 엄청 세서 일의 효율이 몇 배나 된다. 무리하게 고개 넘기기를 시도하다가 도리깨꼭지를 부러뜨리면 하루 일을 망치기도 한다.
타작마당에서는 도리깨끼리 허공에서 부딪치는 공중전을 치르기도 하는데 도리깨 날개 하나가 부러져 튕겨 나가면 얼른 일꾼들이 자리를 넓혀 피한다. 휙 소리를 내면서 허공을 가르다가 퍽 소리를 내며 도리깨가 타작마당에 내리꽂히면 포연처럼 먼지가 솟고 곡식알이 부채꼴로 튀어 오른다.
"어이야~" "저이야~" 하는 흥겨운 추임새에다 "요기다~" "조기다~" "한 번 더!" 하면서 일꾼들끼리 타격 부위를 서로 공유하는 타작마당은 잔치판이 된다. 상쇠처럼 일을 주도하는 일꾼이 "밀어내고~"라든가 "제끼고~"라고 하는 것은, 다 털렸으니 도리깨를 휘감아 때려서 콩 단을 멀리로 쳐 내라는 신호다. 처음에는 자근자근 두드려 알곡이 멀리 튀지 않도록 하다가 얼추 털어 냈다 싶으면 매치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타작을 다 해도 들쥐가 들지 않고 비가 와도 젖지 않을 곳에 보관하려면 집으로 빨리 옮겨 와야 한다. 바퀴 달린 손수레는 편리하긴 해도 비싸기도 하려니와 산골 마을에서는 쓸모가 별로 없어 많이 이용되지 않았다. 산골 마을의 좁은 농로와 크고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 환경에서는 지게를 따를 도구가 못 된다.
지겟가지에다 낫을 두어 자루 꽂고 지게 목발 옆으로는 톱을 가로지른 채 지게 뿔 위로 불쑥 솟아오른 산더미 같은 짐을 지고 동네로 들어서면 온 동네가 갑자기 그늘이 져서 저녁이 된 줄 알고 아낙들이 저녁 쌀 담근다는 전설적인 인물이 우리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의 나무 한 짐이면 한 달 내내 정지간과 쇠죽간 아궁이 불을 땔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들은 어느 마을에나 있다. 나뭇짐을 마당에 부려놓으면 꽈당하는 소리에 지진이 난 줄 알고 다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느니 하는.
욕심이 없어야 진정한 농부? 도리깨 타작만이 다는 아니었고 지게만이 운반 도구의 전부는 아니었다. 도리깨만큼이나 타작마당에 많이 쓰인 것이 '개상'이다. 단원 김홍도의〈타작>이라는 그림에 잘 나와 있다. 통나무를 여럿 나란히 묶어 만들기도 하고 큰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서도 만드는데, 무릎 높이로 다리를 박아서 설치한 다음 이곳에 나락 단이나 콩 단을 내리쳐서 알곡을 떨어뜨린다. 탯돌도 많이 썼다. 윗면이 넓적한 돌을 받침대 위에 비스듬히 놓고 곡식의 단을 내리치는 도구다.
소나 말을 이용해 대량으로 곡식을 옮기는 도구로 '걸채'라는 것도 있었다. 서까래 굵기의 나무로 틀을 짜서 소나 말 위에 얹어 한 번에 곡식을 200~300kg씩 나를 수 있었다.
중국 송나라 때의 <태평어람(太平御覽)> 권 764의 〈품물부〉에는 낫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漢)나라의 백과사전 격인 <석명(釋名)>에도 낫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을 참고로 '그림으로 보는 농사연장'(<임원경제지>, 〈본리지〉 3)을 쓴 서유구는 낫을 한문으로 '鎌(겸)'이라고 한다면서 낫은 곡물을 조금씩 베는 것이므로 그 이치가 '욕심 없음'에 있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농부의 품성을 2천여 년 전에 그렇게 규정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