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 보흐 박물관.험상 궂은 박물관 관리인이 박물관 문을 열어주고 있다.
노시경
성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성 입구에 게르 한 채와 함께 아담한 사각형의 흰색 시멘트 건물이 덩그러니 서 있다. 몽골 친구에게 물으니 이 작은 시멘트 건물이 바로 하르 보흐 박물관이라는 것이었다. 규모도 작고 외양도 전혀 박물관 같이 생기지 않았지만 거란족 유적지인 하르 보흐 발가스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보관하고 전시도 하고 있으니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박물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군가 문을 열어줘야 하는데?""저 옆 게르에 누군가가 있을 거예요.""윗옷도 안 입고 배가 축 늘어진 아저씨가 이 박물관 관리인인가요? 얼굴도 시커멓고 너무 험상궂게 생겼는데?"우리와 함께 간 몽골인 아주머니가 확인해 보니 작은 게르는 박물관 관리인의 집이었고, 얼굴이 검게 그을린 아저씨는 박물관 관리인이었던 것이다. 웃통까지 다 벗고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박물관 관리인의 모습에 그만 웃음이 나왔다.
"박물관 문을 열어 줄게요. 얼마 되지는 않지만 입장료 내야 해요.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이런 곳까지 찾아온 한국인을 만난 것도 오랜만이네."박물관에 들어가는 출입문 좌우에는 마치 박물관을 호위하는 듯이 비석의 귀부(龜趺) 2개가 양 옆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귀부는 거북이 모양을 한 비석의 받침돌인데 거북이의 얼굴은 누가 칼로 내려친 듯이 잘려나가고 없다. 이 거란족의 토성을 공격한 누군가가 비석을 파괴하기 위하여 거북이 목을 쳤을 것이다. 목이 잘린 거북이는 수백 년 동안 초원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비석이 세워져 있던 자리는 비석이 완전히 뽑히면서 사각형 모양의 큰 구멍만 남아있을 뿐이다. 비석의 몸돌은 산산이 부서진 후 몽골의 바람에 섞여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아마도 이 비석에는 하르 보흐 성의 역사가 자랑스럽게 기술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귀부 뒤쪽에는 하르 보흐 성 기둥의 주초석으로 사용되었을 석재 2개가 박물관 문의 장식품처럼 배치되어 있다. 반쯤 깨져버린 이 석재들은 우리나라 불교사원에서 자주 보이는 것과 같은 연꽃무늬를 하고 있다. 석재가 닳은 정도로 보아서는 많은 불교문화재를 남긴 거란 시대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몽골과 북중국의 강자로 군림했던 거란족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불교였기 때문에 이 건축물의 잔해에도 불교의 상징인 연꽃이 남아있는 것이다.
굳게 닫힌 박물관 문이 열리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박물관 안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작은 유물보관소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귀중한 유물들도 일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유리 전시관 안에 소중하게 전시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허름한 책상 위에 유물들을 나열해 두기만 하였다. 유물에 대한 설명서가 모두 몽골어로 되어있는 것도 불편하다. 나는 함께 간 몽골 친구에게 이 유물의 용도 등이 무엇이었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유물들은 흙으로 구운 전돌, 철제 및 석제 농기구, 손바닥만한 크기의 여러 부조불상, 청동제기, 그릇 파편 등이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먹다가 남긴 동물의 뼈, 하르 보흐 성을 하늘에서 찍은 항공사진이 여러 장 전시되어 있다. 전돌에는 과거 몽골인의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있고 나무줄기 같은 기하학적 문양도 담겨 있다. 이 안에 분명 역사적 가치를 몰라주는 귀중한 유물도 있을 듯한데 보관상태가 열악한 게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