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학원에서 만든 화전.
배지영
훈훈한 분위기는 시후네 집에서 놀다 온 꽃차남 덕분에 깨졌다. 초등학교 1학년 2학기에 접어든 꽃차남은 받아쓰기 시험을 본다. 입학 직전에야 보름쯤 한글 공부를 하고서 초등생이 된 꽃차남, 글자를 읽을 줄만 안다. 맞춤법을 잘 모른다. 10년 전에 제규도 그랬다. 무척 고생했다. 그래서 동생만큼은 '받아쓰기 세계의 꽃길'을 걷게 하려고 한다.
1번부터 10번까지 있는 받아쓰기. 띄어쓰기 포함해도, 최고 긴 문장이 15자를 넘지 않는다. 후딱 쓸 것 같다. 그러나 꽃차남은 한 문장 쓰고 나면은 몸이 배배 꼬인다. "힝~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할 거야"라는 만고의 진리를 내세운다. 태연하게 딱지를 치고, 색종이를 접고, 레고를 조립하고, 그림을 그린다. 온 집안을 어지르고 다닌다.
"엄마, 우리 그냥 <길버트 그레이프> 봐요. 보고 싶었거든요. 지금 켤게요."제규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영화. 학생 시절에 참 좋아했던 영화를, 소년이 된 아들과 IPTV로 봤다. 예전에는 청년 가장이던 길버트와 지적장애 동생 어니, 캠핑카 여행자 베키만 보였다.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라서 그럴까. 길버트의 (고마운) 동네 친구들도 보이고, '사랑하는 내 새끼들'에게 '짐'이 되고 만 어머니도 보였다.
나도 제규에게 '짐'을 지워주고 있다. 4년 전부터 영어학원에 다닌다. 밥벌이와 육아뿐인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주 1회, 일 끝나고 가는 거라 부담 없을 줄 알았다. 웬걸! 똥 누고 뒤처리를 못 하는 애를 둔 처지라서 매번 '갈까 말까' 고민했다. 남편은 밤에 더 바쁜 사람, 그러니 "1일 1똥 모닝똥을 싸자"는 가훈을 만들어서 꽃차남에게 호소까지 해봤다.
"공부하고 오세요. 동생 안 울리고 진짜로 잘 볼게요." 제규 덕분에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계속 공부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는 쌓이지 않을 때가 있다. 저축되지 않는다. 갚아야 할 '은혜'가 엄청나게 많은데도, 어느새 부탁하고 있다. 나는 또 입을 뗐다. 매주 토요일은 제규가 친구들 만나서 온종일 노는 날, 그런데 우리 부부는 아침 일찍 서울에 가야 한다.
"제규야, 미안해. 토요일은 너도 약속 있잖아. 근데 꽃차남 볼 수 있어?""어차피 한식조리사 공부하려고 했어요. (웃음) 엄마 어디 가면, 나도 좀 좋잖아요." 제규와 꽃차남, 고성과 '터치'가 오가는 형제 사이. 엄마 아빠가 모두 집에 없으면, 꽃차남은 태세전환에 들어간다. 제규를 "형형"이라고 하지 않고 "형형님"이라고 부른다. 사람 신경이 곤두서게 징징대는 태도도 거의 버린다. 제 형이 시키는 대로 한다. 텔레비전 끄라면 그만 보고, 장난감 치우라면 정리하고, 밥을 먹으라면 군말 없이 식탁에 앉는다.
열여덟 소년의 밥상, 단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