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수학여행 기념사진 경주 안압지에서(왼쪽이 김귀동)
김귀동
김 변호사는 군산시 회현면 소농가의 장남(3남 1녀)으로 태어났다. 부모 재산은 논 세 필지가 전부. 가족이 함께 농사를 지어 고생은 됐지만 끼니 걱정은 안 했다. 집에서 약 4km 떨어진 용화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6년 내내 급장을 맡았다.
장래 희망은 전투기 조종사. 굉음과 함께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창공으로 치솟는 전투기를 볼 때마다 공군 파일럿이 된 자신의 멋진 모습을 상상했다. 존경하는 인물은 굳은 결의로 나라를 지키다가 전사한 계백 장군과 이순신 장군. 농번기에는 못줄도 잡고, 수차(무자위)도 돌리고, 만경강에서 친구들과 물장구도 쳤다.
서울대 진학이 모두의 로망이던 1960년대 초. 귀동의 집을 방문한 담임이 군산은 서울대 진학률이 낮으니 서울이나 전주, 아니면 이리(익산) 남성중은 가야 한다고 강력히 권유한다. 이에 아버지는 서울은 꿈도 꿀 수 없고, 전주는 하숙해야 하는데 하숙비 대줄 형편이 못 된다며 난감해한다. 그때 어머니가 타협안을 내놓는다. 기차통학을 한다면 남성중에 보내주겠다는 것. 귀동은 어머니의 합리적인 중개로 남성중고등학교 6년을 마칠 수 있었다.
"기차통학을 하면서 수업 시작 전 학교에 도착하려면 늦어도 새벽 4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했습니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허둥지둥 새벽밥을 먹고 5시쯤 집을 나섰어요. 집에서 대야 역까지 왕복 14km를 걸어서 다녔거든요. 집에 자명종 시계가 없었음에도 어머니는 6년 동안 한 번도 기차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보살펴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여간 정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그 희생적인 정성과 사랑은 말로 표현되기 어렵죠. 시간이 빡빡하다 보니 실력이 쟁쟁한 급우들을 따라잡기가 어려웠습니다. 고육책으로 집에서 대야 역까지 오가는 2시간 30분을 영어단어와 수학 공식 외우는 예습시간으로 정했죠. 기차 타는 시간도 활용했습니다. 일요일은 총 복습시간으로 이용했어요. 그때 우리 마을(증석리)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등잔불을 켜고 살았습니다. 졸면서 공부하다가 앞머리가 타서 급우들에게 놀림당하던 기억도 새롭네요. (웃음)"서울대에 두 번 입학, 고시합격은 졸업 후로 미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