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령 표지석한계령 정상에 세워진 오색령 표지석
정덕수
성악가를 비롯해 참으로 많은 이들이 한계령을 불렀다. 그런 노래들을 대부분 들어 본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눈 이들이 불러준 한계령은 의미가 또 다르다.
이 노래를 지난 2014년 10월 3일 오색에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는 박강수씨가 불렀다. 산악영화제에 초대가수로 온 박강수씨는 직접 낸 음반도 6장이나 된다. 그런 그가 한계령을 부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건 당연하다. 두 곡의 노래가 끝날 때 찾아 온 이와 함께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도로로 나와 있었다. 그때 그의 목소리로 한계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박강수란 가수는 올림픽공원에서 박순백 박사님의 소개로 2001년 처음 만났고, 그 다음해에도 같은 시기에 만났다. 그러나 이번엔 장소가 바뀌어 오색에서 개최되는 산악영화제에 초대되었기에 한계령을 불렀으리라.
그의 노래가 끝나고 스피커를 통해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박강수씨의 무대도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스피커를 통해 들린 사회자의 말은 예상을 빗겨났다.
"이곳에 지금 박강수 씨가 부른 한계령의 원작자가 계시다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셨다고 들었는데 계시면 잠시 무대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200여 미터는 떨어진 거리에서 무대를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참으로 멀게 느껴졌다. 그날 박강수씨의 무대가 끝나고 함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인사를 나누었다.
누구나 자신의 고향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가난한 시절 장작더미를 높이 쌓아놓고 흐뭇한 표정을 짓던 이들처럼, 가난한 이들이 높게 쌓아올린 장작가리와 같은 따뜻함에 대한 충만한 동질성이 있다.
따뜻한 온기를 더 많이 느끼기 위해 톱날을 나무를 자르기 좋게 손질하고 도끼를 잘 들도록 벼린다. 노래를 부르는 이가 더 많은 감동을 듣는 이에게 안기고자 함도 자신에게 돌아올 성원이 그에 비례함을 알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이치며,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각별함도 더 오래 고향이 지닌 푸근함을 가슴에 간직하고자 함이다.
숲에 빛이 고루 비추어지게 만들려고 나무를 솎아내는 나무꾼은 없었다. 가족들과 따뜻한 온기를 나눠야하기 때문에 나무를 베고, 돈이 되기에 나무를 잘라 낼 뿐 숲을 위한 행동은 아니다.
이들의 행동은 모두 목적에 충실하다. 숲을 가꾸는 이가 땔감을 위해 나무를 자르는 이들을 보면 속이 바짝 탈 노릇이겠으나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던 시절엔 구역을 정해주고, 땔감으로 자를 수 있는 나무의 크기와 조건 등을 지정하는 방법 외엔 도리가 없었다. 노래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조건에서 만들어지고 불린다. 숲을 가꾸기 위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를 계몽하기 위해 노래를 만들고 부르라면 열정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