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관리사업소 발행 <행주산성>에 수록되어 있는 화차 겸 총통기의 사진
행주산성관리사업소
권율도 직접 칼을 뽑아들고 왜적들과 백병전을 벌였다. 부녀자들조차 짧게 자른 치마에 돌을 담아 날라 '행주치마'라는 단어의 민간어원(民間語源)이 되었고, 병사들은 그 돌을 왜적들을 향해 집어던지며 싸웠다.
조선군의 무기 부족 상황을 눈치챈 일본군은 재차 총공격을 준비했다. 이때 경기수사 이빈(李蘋)이 화살 수 만 개를 싣고 한강에 나타났다. 이빈이 뒤에서 공격할 태세를 취하자 일본군은 크게 당황, 황급히 군사들을 빼내어 서울로 퇴각했다. (1593년 2월 24일 <선조실록>에는 '화살이 다 떨어져갈 때 충청병사 정걸이 화살을 가져와 위기를 구해주었다矢幾垂盡 而適忠淸兵使丁傑 運箭以濟其急'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전쟁사에서 행주대첩의 의의<행주산성>은 '행주산성 전투 승리의 4대 요인'을 말해준다. <행주산성>은 '1) 민, 관, 군, 승려, 부녀자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목숨을 건 전투 2) 권율 장군과 휘하 장수들의 전략과 전술 3) 과학적으로 설계된 최신 무기 사용 - 화차, 총통기, 신기전 등 화약을 사용한 무기 4) 강과 절벽 등으로 배수진이 형성된 자연지리적인 조건'의 네 가지를 행주대첩 승리의 바탕으로 들고 있다.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이치 대첩(권율), 진주 대첩(김시민), 행주 대첩(권율)'을 들고 있다. 또 '임진왜란 3대첩'으로 '진주 대첩(김시민), 한산 대첩(이순신), 행주 대첩(권율)'을 들고 있다. 행주대첩은 두 곳에 두루 들어 있다. 행주대첩의 의의를 알아보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 발간 <신편 한국사>를 읽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