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가지들의 추락, 범인은 바로 '요놈'

곤충의 놀라운 모성, 내 자식 배불리 먹일 수만 있다면…

등록 2016.08.24 14:23수정 2016.08.24 14:2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도토리거위벌레
도토리거위벌레농업유전자원정보센터

 도토리거위벌레
도토리거위벌레농업유전자원정보센터

1cm의 작은 몸에 거위처럼 긴 주둥이, 도토리거위벌레


광양 백운산에는 음흉한 정원사가 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몰래 가지를 툭 잘라낸다. 나무를 다듬기 위해서? 아니다. 그 정원사의 목적은 오로지 '내 자식'을 위해서다. 1cm의 작은 몸에 거위처럼 긴 주둥이를 가진 '도토리거위벌레'가 바로 그 주인이다.

백운산을 거닐다보면 우리는 종종 허공에서 떨어지는 도토리가지에 머리를 얻어맞곤 한다. 어떤 놈인가 하고 고개를 올려다 보면 하늘은 울창한 참나무 잎들만 무성하다. 그리고 또 저쪽, 나뭇잎을 낙하산 삼아 가지 하나가 더 떨어진다.

어느새 길바닥은 몸을 내던진 도토리 가지로 수북하다. 도토리의 자살인가? 떨어진 도토리 가지를 주우며 생각한다. 그러나 매끈히 잘려나간 가지 끝을 보면, 꼭 누군가 가위로 도려낸 것만 같다. 사람의 소행인가? 하지만 이 땡볕 더위에 나무 위에 올라가 도토리를 떨어뜨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토리묵을 너무 사랑하는 미식가라면 모를까.

범인이 새끼손톱보다 작은 '도토리거위벌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잇몸이 시큰했다. 가는 주둥이로 질긴 나뭇가지를 잘라내는데 몇 번을 베어 물었을까, 벌레의 턱관절이 괜스레 걱정된 것.

그것도 가지 하나가 아니라 20-30개의 가지를 벌레 한 마리가 다 자르고 다닌다니, 아마도 지금 그는 임무를 마치고 나무 위에 벌러덩 누워 얼얼해진 주둥이를 잡고 시름시름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나무를 자르는 것은 순전히 자식의 탄탄한 미래를 위해서다. 도토리거위벌레는 딱 이맘 때 쯤, 도토리 열매에 구멍을 내고 산란관을 꽂아 알을 낳는다. 설익은 도토리의 단단한 껍질을 뚫기 위해서 반나절을 꼬박 주둥이를 쳐 박고 돌고 또 돈다. 그렇게 뚫은 도토리가 과육이 영 시원찮으면 과감히 포기하고 더 맛있는 도토리를 찾기도 한다.

자식에게 최선의 밥상을 차려준 다음에는 안전히 땅으로 안착시키는 과정을 밟는다. 곧 다가올 겨울을 무사히 나기 위해서는 땅속에서 동면을 해야 하는데, 나무에 매달린 채로는 어린 애벌레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식의 안전한 생을 위해 엄마 도토리벌레가 대신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도토리벌레는 알을 낳은 뒤, 열매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의 가지를 자르기 시작한다. 나뭇잎을 몇 장 매달고 떨어뜨려야 충격이 완화가 돼 애벌레가 다치는 일이 없기 때문. 그렇게 입으로 톱질하는 데 또 한나절을 보낸다.

그렇게 도토리거위벌레는 산란의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식의 생을 위해 일하고 또 일하다, 마침내 자식을 부드러운 흙모래 위로 안전히 보내고서야 여생을 마무리한다.

지구 온난화로 거위벌레 유충 증가, 야생동물의 식량 위협

도토리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 가지
도토리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 가지박주식

거위벌레의 이기적인 모성을 응원하듯 지구 온난화가 그들의 '인구 늘리기 정책'을 열심히 뒷받침해주고 있다. 겨울철 온도가 예년에 비해 상승하면서 거위벌레의 동면을 더 수월하게 만들어 주는 것.

때문에 해마다 거위벌레 유충들의 탄생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 벌레들이 성충이 돼 또 도토리를 자르고 자르다 보니, 이제는 다람쥐나 멧돼지 등 야생동물의 가을철 식량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구 절벽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우리는 그들을 시샘하듯, 해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박멸에 나섰다.

도토리거위벌레의 증가에 가장 피해를 입는 동물은 다람쥐다. 동면을 위해 부부가 합심해 땅 속에 굴을 파고 해마다 도토리 수백 알을 모으는데, 거위벌레 유충이 갉아먹고 남은 텅 빈 껍데기 도토리뿐이니 창고 채우기가 퍽 힘든 것.

백운산 도토리 가지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다람쥐의 닭똥 같은 눈물도 한 방울 떨어지니, 다람쥐는 올 겨울만 생각하면 마음이 쓰라리다.

산림청에서는 7-8년 전부터 거위벌레 발생에 따라 도토리 결실률이 해마다 떨어지는 것에 대응해 방제 대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온난화가 가중되는 한 거위벌레의 축복받지 못하는 탄생은 계속 될 것이다.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다람쥐가 하룻밤 식량이라도 더 비축할 수 있도록,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오지 않는 것 뿐.

실상, 제 자식 많이 낳고 배불리 먹이겠다는 도토리거위벌레를 어찌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그저 본능이고, 생태계의 일환일 뿐. 거기에 인간이 만든 온난화가 불균형을 초래하며 부채질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 누굴 탓할 수 있으랴?

도토리 절단된 도토리 가지
도토리절단된 도토리 가지박주식

#광양 백운산 #도토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가끔 꼭 쓰고 싶은 일들이 있어 오마이뉴스와 함께 하려 합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3. 3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4. 4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5. 5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