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선조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위 사진)을 지나, 다시 도성 서문인 돈의문을 지나 명나라 쪽을 향해 피란을 떠났다.
정만진
문화재청 누리집은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남향 건물이고, 좌우 협칸을 벽체로 막아 3문형식이다. 중앙은 왕의 전용 출입문인 어문(御門), 좌우문은 당상관 이상 높은 관료가 드나들던 문이었는데, 3사(三司,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언관(言官, 왕에게 바른 말을 하는 관리라는 뜻)은 관직은 낮아도 좌우 문을 드나들 수 있었다.
돈화문의 중앙은 임금의 전용 출입 어문이었다? 사당이나 서원 등에 있는 보통의 삼문(三門)들은 중앙 문이 닫혀 있고 좌우의 두 작은 문으로만 드나드는데, 돈화문은 가운데 큰문으로 임금 혼자 출입을 했다? 그렇다면 이 문을 통해 궁궐 밖으로 나선 조선의 임금 중 한반도 대중의 뇌리에 가장 뚜렷하게 각인된 장면을 남긴 왕은 누구일까? 저절로 <조선왕조실록>이 떠오른다.
1592년 4월 13일자 <선조실록>은 '이날 밤 호위하는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궁문(宮門)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금루(禁漏)는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돈화문을 지키는 장졸들이 모두 진작에 도망을 쳐버렸다는 증언이다.
실록은 '새벽에 상(上, 왕)이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중심 궁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라고 전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퍼부었다는 것이다.
호위하는 신하는 100명도 안 되고 비까지 오는 밤에 피란 떠나는 선조실록은 이어서 선조와 왕비, 태자 등의 곤궁한 처지를 말해준다. 실록은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고,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태자)은 반찬도 없었다.'면서 '병조판서 김응남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여전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고, 경기관찰사 권징은 무릎을 끼고 앉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라고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