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사 대웅전팔공산 부인사 대웅전
신재화
지금은 동화사, 파계사 등에 묻혀 일삼아 필자와 같은 답사객이나 신도들이 찾는 곳이지만, 부인사는 이규보의 글에서 보는 것과 같이 고려 시대에는 왕실의 주도로 진행된 대사업이었던 대장경판을 보관하던 곳이었으며, 2천여 명의 승려가 39동의 건물에서 수련하던 대가람이었다. 그런 규모 때문인지 한창때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려들끼리만 모여 거래하던 승시장(僧市場)이 서기도 했던 곳이다.
그렇게 화려했던 부인사의 영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대장경이 소실되고, 임진왜란에 절 자체가 전소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흔적만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0년대에 들어 허상득이라는 비구니 스님에 의해 다시금 절의 모양새가 갖춰지고 최근 들어서 번듯한 법당과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해서 이제는 제법 절의 면모를 세워가고 있다.
하지만, 세월의 이끼가 아직 내려앉지 않은 탓일까. 동화사와 파계사를 잇는 팔공산 순환도로에서 슬쩍 산으로 올라앉은 부인사는 입구의 주차장까지 오르는 좁은 도로를 지나면서 느끼는 부드러운 설렘과, 소담한 부도를 끼고 돌아 오르는 진입과정의 예스러움, 아직 남아있는 석축과 이리저리 지난 시절의 흔적을 찾아 모은 여러 유적의 자국을 지나는 여정에 비해 새로이 들어선 절간의 모습은 마치 풍요롭고 조용하던 시골 마을 가운데에 능력 좋은 사장님이 반듯반듯하게 터를 닦고, 이리저리 밀고 쳐낸 뒤 지어놓은 이층양옥집 같은 느낌이 들어 이질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세를 일으키고, 부처님의 영험함을 받들어 절을 찾는 신도 대중들에게 조금 더 잘 차려진 절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그것을 탓할 수 없이 그저 세월의 더께가 좀 더 얹어지면 더 좋은 모습으로 남을 수 있겠거니 위로할 뿐이다.
그렇지만 일삼아 답사를 오는 이들에게 부인사는 느긋하게 걸어 다니면서 눈여겨 볼 만한 선조들의 흔적들이 있으니, 그 옛날의 영광을 간직한 채, 부인사의 주변 옛터들에서 모아놓은 석등과 누가 보아도 신라의 그것이라 짐작할 수 있는 석탑, 그리고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승탑이 그것이다.
숨결처럼 자리 잡은 부인사의 유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