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차라리 숙제를 파업하자

공부는 누가 더 가지고 덜 가진 걸 확인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등록 2016.08.19 14:47수정 2016.08.1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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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 가지고' '더 가지는 것'을 확인하는 방학숙제라면... 얘들아, 차라리 파업하자(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작품)
'덜 가지고' '더 가지는 것'을 확인하는 방학숙제라면... 얘들아, 차라리 파업하자(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작품)wiki commons

나는 요즘 두 세계를 오간다. 다큐멘터리의 호흡 상대가 되는 가난한 아이들과 학원이라는 제도 안에 있는 아이들을 번갈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내일,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의 방학 숙제를 같이 봐주기로 했다. 영어 동화책 세 권을 읽고 독후감을 써가는 것인데, 만약 집안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거나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이 숙제를 어떻게 해가는지 궁금하다.

일단 영어 동화책 세 권을 구하기 위해서도 일정한 문화자본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셈이다. 도서관에 자주 다녀서, 어딜 가야 영어 동화책을 빌릴 수 있는지 잘 알거나 혹은 서점에 가서 아이의 수준에 맞는 적절한 책을 골라줄 수 있는 수준의 부모를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원에라도 다녀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자녀의 사교육비를 매월 고정적으로 지출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부모를 만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가난한 아이들, 특히 문화자본이 부족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낙오하는 시기가 앞으로 점점 더 빨리 다가올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까짓 모범생이 한 번 되는 데에도 이렇게나 필요한 게 많다.

개학이 다가온다. 이 숙제를 끝내지 못한, 아니 시작하지도 못한 아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 아이들은 개학이 기다려질까? 어떤 마음으로 학교에 다시 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까. 혹시 새로운 학기의 첫날을 야단 맞는 것으로 시작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 아이들은 이 사회에 대해 과연 어떤 인상을 받게 될까.

학교는 미리 배워온 것을 확인하는 곳이 아니라 열린 감각으로 뭔가를 새로이 알게 되는 기쁨의 공간이어야 한다. 우리는 함께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숙제는 아이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수준이어야 한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을 때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실패했을 때는 그 좌절의 경험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배워가는 것.


공부는 그런 것을 깨닫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 단순히 누군가가 '더 가진 것', '덜 가진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뿐이라면 그런 숙제는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숙제 파업이라도 독려하고 싶은 심정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다솜씨는 현재 미디어 활동가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방학 숙제 #진짜 학교란 #숙제 파업해라 아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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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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