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삼천리
일본 내지의 경찰 당국은 병합 전부터 거주 조선인 명부를 작성해서 감시와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병합 뒤에도 그런 관행에는 변함이 없었다. (25쪽)
제사공장과 함께 '여공애사'를 상징하는 방적공장은 일본의 공업화를 견인한 부문이었는데, 급격한 성장 탓에 노동자가 부족한 공장도 많았다. 그 때문에 조선에서 여성 노동자를 집단으로 데려와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24시간 조업하는 공장의 장시간 노동에 투입되었을 뿐 아니라, 먼지와 소음이 심한 노동 현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26쪽)일제강점기에는 '황민화 교육'을 받지 않으려고 스스로 학교를 세우다가 학교를 빼앗긴 재일조선인이라고 합니다. 해방 뒤에는 '일본화 교육'을 받지 않으려고 다시금 스스로 학교를 세운 재일조선인이라고 하는데, 이때에도 일본은 여러모로 법을 비틀거나 '통달문'을 내려서 '재일조선인 자립교육'을 막으려고 했다는군요.
일본 정부는 왜 이토록 재일조선인을 억누르거나 괴롭히려 했을까요. 제국주의나 전쟁주의로 치닫던 때에는 바보스러웠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끝난 뒤에 왜 스스로 평화로운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1920년대에는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방면위원 제도가 정비되었으나, 방면위원이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삼은 적은 거의 없었다. (77쪽)1930년대 중반에 조선인의 자주적인 교육기관이 폐쇄된 뒤 조선인 아이들은 일본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당국은 학교교육을 통해 일본으로 동화시키고 일본 정신을 주입하기 위해 그때까지 취하던 방임적 자세를 버리고 조선인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학교에서 받아들여 '협화 교육', '황민화 교육'을 시키는 쪽으로 방침을 전환했다. 그러나 조선인 어린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차별적인 대우였고 자기부정을 강요당하는 교육 내용이었다. (81쪽)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한국도 일본 못지 않게 평화하고는 등을 졌다고 느낍니다. 일본은 일본대로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바보짓을 했고, 한국은 한국대로 해방 뒤에 반민주와 반평화로 치닫는 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꽤 오랫동안 군사독재가 이어졌어요.
해방 뒤에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했거나 일본에 눌러앉아서 씩씩하게 살아가려 했던 이들이 남·북녘을 바라볼 적에는 씁쓸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느껴요. 서로 '한 나라'가 되어서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해도 이웃 다른 나라들 등쌀에 고단한데, 외려 남·북녘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군사무기를 늘리면서 툭탁거렸거든요.
남·북녘 모두 평화롭거나 민주다운 정치를 보여주지 못했어요. 더욱이 남녘은 새마을운동 바람에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며 시골이 텅 비고, 도시는 도시대로 도시빈민이 부쩍 늘어났어요.
일본 당국은 조선인들을 동화해서 전쟁 동원의 대상으로 삼는 한편으로 후방의 사회질서를 교란할지도 모르는 존재라고 보았다. (96쪽)
통달한 통으로 외국인이 되어 버린 재일조선인들은 법률 제126호에 따라 당분간의 체류는 허용되었지만, 국외로 퇴거강제 규정을 집어넣은 출입국관리령의 대상이 되어 외국인등록증을 상시 휴대하고 지문날인을 하는 게 의무 사항이 되었다. (145쪽)